미국의 대외 관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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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미국 영토에서의 식민지 ‘개발’은 처음부터 다민족 국가가 될 운명을 예정하듯이 진행되었다. [[버지니아]]와 [[캐롤라이나]]에는 영국인([[뉴잉글랜드]])이 식민지를 개척하였다. 16세기, [[프랑스인]] [[자크 카르티에]]의 탐험으로 시작된 프랑스의 북미 식민지([[누벨프랑스]])의 영토는 전성기에 [[뉴펀들랜드]]에서 [[로키 산맥]]까지 그리고 [[허드슨 만]]에서 [[멕시코 만]]에 이르렀다.<ref>{{서적 인용 |저자=Andrew John Bayly Johnston |날짜=2001 |제목= Control and Order in French Colonial Louisbourg, 1713–1758 |url=http://www.jstor.org/stable/10.14321/j.ctt7zt68f |위치=미국 |출판사=Michigan State Universtiy Press |쪽=8-9 |isbn=978-0870135705 |확인날짜= }}</ref> 그 중, 현재의 미국 영토에 해당하는 곳은 [[누벨프랑스]]의 한 행정구역이었던 [[프랑스령 루이지애나]]로서, [[미시시피 강]] 유역의 대부분을 포함하고 있으며 남북으로는 [[오대호]]에서 [[멕시코 만]]까지, 동서로는 [[애팔래치아 산맥]]에서 [[록키 산맥]]까지 영역이 뻗어 있었다. 이처럼 ‘개발’은 주로 영국인과 프랑스인 두 민족에 의해 이루어졌고 여기에 더해 [[네덜란드]]가 [[뉴네덜란드]](현재의 [[코네티컷]], [[뉴욕]], [[뉴저지]], [[델라웨어]])를, 스웨덴이 [[뉴스웨덴]](1638년~1655년, [[델라웨어 강]] 사이에 [[델라웨어 만]]으로부터 현재의 [[뉴저지 주]] [[트렌턴 (뉴저지 주)|트렌턴]]까지)을, [[플로리다]]에는 스페인이 [[누에바에스파냐]](현재의 [[미국 남서부]]와 [[플로리다]]가 여기에 속한다.)를, 각각 나름대로 식민지로서 구축했다. <!--요약본 끝-->
 
1607년 영국은 [[버지니아 주|버지니아]]에 [[제임스타운 (버지니아 주)‎|제임스타운]]이라고 명명된 북미 대륙 최초의 상주 식민지를 세우기 시작하였고, 이어서 [[버지니아]]와 [[캐롤라이나]]도 개척하였다. 북미 동해안을 장악한 영국은 원주민 인디언을 몰아내고 영토를 서부로 확대하고 [[13개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신교도가 다수파를 차지하는 북미 식민지는 [[영국 성공회]]를 국교로 하는 영국과 알력이 있었다. 당시에는 종교적, 정신적으로 본국과 분리되었으며, 경제적으로도 자립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18세기에 들어가면, 한랭한 기후로 비교적 농업에 적합하지 않은 동북부에서 [[양조]] · [[조선]] · [[운수]] 등의 산업이 발달하면서 영국 본국의영국의 경제를 압박하게 되었다. 그러자, 신교도가영국은 다수파를식민지가 차지하는영국 북미이외에 식민지는양털, 실, 모직물을 수출하는 것을 금지([[영국모직 성공회조례]], 국교로1699년)하고, 하는철을 영국과녹이는 알력이것을 있었다.금지([[철 당시에는 종교적조례]], 정신적으로1750년)하여 본국과공업의 분리되었으며,발전을 경제적으로도방해하였다. 자립할여기서 있는엄격한 힘을[[중상주의]] 가지고정책을 있었다시행하여 식민지를 더욱 압박했다.
 
영국은 일찍부터 〈양모제품법〉이나 〈철법〉으로 북미 식민지에서의 공업 발전을 방해했고, 영국과의 무역 이외의 독자적 무역을 금지해 왔지만, 여기서 더 엄격한 [[중상주의]] 정책을 시행하여 식민지를 더욱 압박했다. [[7년 전쟁]]의 일환으로 [[북아메리카]]의 식민지 지역에서 벌어진 [[프렌치 인디언 전쟁]](1755~63년)의 종결은 프랑스 · 영국과 미국간의 관계에 변화를 야기하였다. 이 전쟁에서 프랑스가 영국에 패함으로써 1763년에 미시시피 강을 경계로 동쪽을 영국에, 서쪽으로는, 플로리다를 영국에 빼앗긴 [[스페인]]에 양도했다. (하지만, 프랑스는 비밀 조약으로 서쪽 영토를 되찾았다. ) 한편, 1763년 [[대영 제국]]은 무려 1억 3000만 [[영국 파운드|파운드]]의 빚을 지고 있었는데, 한 해 이자만 450만 파운드에 달하는 액수로 제국 유지비용의 상당액을 《[[인지세법]]》(1765년), 《[[타운젠드법]]》(1767년) 등 각종 과세를 통해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충당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대영 제국]]의 결정은 아메리카 식민지의 대표들의 참여 없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13개 식민지]]는 “[[무대표 무과세|대표의 참여 없는 세금 부담은 무효]]”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격렬한 반대 운동의 전개로 영국은 이듬해 이 세금을 철폐했지만, 이번엔 〈[[차법]]〉으로 차의 무역을 독점하려 했다. 이에 격분한 개척민들은 1773년에 [[보스턴 항구]]를 습격하여, ‘[[보스턴 차 사건]]’을 일으켰다. 보스턴 차 사건에 충격을 받은 영국은 보스턴 항구를 폐쇄하고, 주민들에게 강경한 조치를 취하였다.
 
애국자라 불리던 독립파 인사들은 서신 교환을 통하여 영국 제국에 대항하기 위한 독자적인 의회의 구성에 합의하였고 이들은 1774년 [[1차 대륙회의]]를 개최하고, 식민지의 자치권을 요구하면서 영국에 대하여 저항할 것을 결의하였다. 영국이 [[군대]]를 파견하자(1775년) 미국인들은 [[민병대]]를 조직하여 대항하였다. 1775년 4월 영국의 주둔 병사와 주민들이 운영하는 민병대 사이에 충돌([[렉싱턴 콩코드 전투]])이 발생하여 이것은 전쟁으로 이어졌다. 즉, 13개 식민지는 영국 제국을 상대로 [[미국 독립 전쟁]](1775~83년)을 치렀다. 개척민 대표들은 [[제2차 대륙 회의]]를 개최(1775년)하여, [[조지 워싱턴]]을 전쟁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대륙군]]을 결성하였다. [[미국]] 내의 왕당파가 인구의 30%에 이르렀음에도 독립파들은 전쟁 기간 동안 식민지의 80%가 넘는 지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였으며 [[대영 제국]]은 일부 해안 지역만을 방어할 수 있을 뿐이었다. 1776년 7월 4일 대륙 회의에서 [[토머스 제퍼슨]]이 초안한 개신교적 사상을 드러낸 현대 민주주의의 원점이 된 [[미국 독립 선언]]을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