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드루 잭슨: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138번째 줄:
 
이런 일로도 알 수 있듯이 잭슨은 연방에 대한 주(州)의 권리를 중요시하는, 남부 출신의 주권(州權)주의자였다. 잭슨 시대의 연방정부는 균형재정을 유지하고, 부채를 지지 않았다. 그러나 사우스캐롤라이나주에서 연방법을 [[:en:States' rights|주의 권한]]으로 무시하고, 주는 합중국으로부터 자유롭게 이탈할 수 있다는 운동이 일어나자([[:en:Nullification Crisis|무효화의 위기]]), 잭슨은 이 움직임을 강하게 견제하였다. 결과적으로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이반은 와해되었지만, 그 시대의 이러한 운동은 훗날 [[에이브러햄 링컨]] 시대의 남부 여러 주의 연방이탈 시의 운동에 강한 영향을 미쳤다.
 
===인디언 축출===
1832년 3월, 보호구역에 있던 [[세미놀 족]] 수장들이 미국 정부와의 협상을 위해 소집되었다. ([[패인즈 랜딩 조약]] 참조) 7월에는 [[검은 독수리]]라고 불리는 인디언 추장이 백인마을을 습격하였다.
 
===외교===
잭슨 정부의 2기(期) 동안 외교에 있어서는 대체로 평온하였다.<ref>John M. Belohlavek, ''Let the Eagle Soar!: The Foreign Policy of Andrew Jackson'' (1985)</ref><ref>John M. Belohlavek, "'Let the Eagle Soar!': Democratic Constraints on the Foreign Policy of Andrew Jackson." ''Presidential Studies Quarterly'' 10#1 (1980) pp: 36-50 [http://www.jstor.org/stable/27547532 in JSTOR]</ref> 가장 심각한 위기는 프랑스와 있었는데, 잭슨이 임기를 개시한 1829년에는1829년, 나폴레옹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미국 선박들의 나포에 따른 약탈에 보상 요구가 미국과 프랑스 정부 간의 긴장 관계를 야기하였다.{{sfn|Latner 2002|pages=119–20}} 20여년전, 나폴레옹 치세의 프랑스 해군이 미국 선박들을 나포하고 어떤 보상이나 사법적 절차도 없이 강제 노역을 시키고서는 스페인의 항구로 그 배들을 끌고 갔었다. 국무장관 [[마틴 밴 뷰런]]에 따르면, 미국과 프랑스 간의 관계는 "희망이 없었다." {{sfn|Latner 2002|pages=119–20}} 그러나,그런데 이를 잭슨 정부의 주(駐)프랑스 공사 [[:en:William Cabell Rives|윌리엄 캐벨 리브스]] 외교를 통하여, 배상금으로 2500만 프랑(500만달러)를 지급하는 배상금 조약에 프랑스가 서명(1831년 7월 4일)하도록 하였다. <ref name=Cunningham_1999>{{cite web |last=Cunningham |first=Hugo S. |title= Gold and Silver Standards France |date=1999 |url=http://www.cyberussr.com/hcunn/gold-std.html#france |accessdate=2016-1-5}}</ref>그런데 그러나, 프랑스 정부는 내부의 재정 결핍과 정치적 어려움으로 납부를 연체하였다. 프랑스의 [[루이 필리프 1세]]와 그의 내각은 [[:fr:Chambre des députés (Troisième République)|프랑스 대의원(代議院)]]을 비난하였다. {{sfn|Latner 2002|pages=119–20}} 1834년까지도 프랑스 정부가 보상금을 지급하지 않자, 잭슨은 분노하였고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었다. 1834년 12월 1일자, [[:s:en:Andrew Jackson's Sixth State of the Union Address|메시지를 통한 제6차 국정 연설]]에서 프랑스 정부의 납입 연체를 단호하게 질책하고, 미연방정부는 프랑스 정부에 단단히 실망했다는 점을 표명하고, 프랑스에 대한 무역 보복을 승인해 줄 것을 의회에 요청하였다.{{sfn|Latner 2002|pages=119–20}} 잭슨의이와 성명에같이 모욕감을잭슨은 느낀전쟁이라도 프랑스인들은불사하겠다는 사과를태도를 요구하였다. 1835년 12월 7일자취하였고, [[:s:en:Andrew Jackson's Seventh State of the Union Address휘그당(미국)|메시지를 통한 제7차 국정 연설휘그당]]에서 잭슨은 사과하기를 거절하면서, 그는 프랑스인들에 대해 좋은 견해를 가지고 있으며 그의 의도는호전성을 평화적인 것이라고 해명하였다비웃었다. 그는 조약의 배경이 되는 역사에 대해서 길고도 자세하게 설명하였고, 또한 프랑스 정부가 의도적으로 지급을 지연하는 것이라는 그의 신념도 설명하였다. 프랑스 정부는 잭슨의 교서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1836년 2월에 마침내 보상금을 지급하였다.{{sfn|Latner 2002|pages=119–20}}
 
잭슨의 성명에 모욕감을 느낀 프랑스인들은 사과를 요구하였다. 1835년 12월 7일자, [[:s:en:Andrew Jackson's Seventh State of the Union Address|메시지를 통한 제7차 국정 연설]]에서 잭슨은 사과하기를 거절하면서, 그는 프랑스인들에 대해 좋은 견해를 가지고 있으며 그의 의도는 평화적인 것이라고 해명하였다. 그는 조약의 배경이 되는 역사에 대해서 길고도 자세하게 설명하였고, 또한 프랑스 정부가 의도적으로 지급을 지연하는 것이라는 그의 신념도 설명하였다. 프랑스 정부는 잭슨의 교서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1836년 2월에 마침내 보상금을 지급하였다.{{sfn|Latner 2002|pages=119–20}} <ref>Robert Charles Thomas, "Andrew Jackson Versus France American Policy toward France, 1834-36." ''Tennessee Historical Quarterly'' (1976): 51-64 [http://www.jstor.org/stable/42623553 in JSTOR]</ref><ref>Richard Aubrey McLemore, "The French Spoliation Claims, 1816-1836: A Study in Jacksonian Diplomacy," ''Tennessee Historical Magazine'' (1932): 234-254 [http://www.jstor.org/stable/42637629 in JSTOR].</ref>프랑스 뿐만 아니라, 잭슨 정부는 [[덴마크]], [[포르투갈]], [[스페인]]과의, 약탈에 따른 보상금 청구도 성공적으로 합의하였다.{{sfn|Latner 2002|page=120}}
프랑스 뿐만 아니라, 잭슨 정부는 [[덴마크]], [[포르투갈]], [[스페인]]과의, 약탈에 따른 보상금 청구도 성공적으로 합의하였다.{{sfn|Latner 2002|page=120}} 잭슨 정부의 [[미국 국무부|국무부]]는 활발히 움직여서 [[니콜라이 1세|러시아 제국]] · [[스페인]] · [[마흐무트 2세|오스만 제국]] · [[영국]] · [[라마 3세|라따나꼬신 왕국]](1833년)과의 무역 조약의 체결을 완수하였다. 영국과의 조약으로, 미국은 서인도 제도에서의 무역을 재개하였다. {{sfn|Latner 2002|page=120}} 라따나꼬신 왕국과의 무역 조약은 미국이 아시아 국가들과 맺은 최초의 조약이다. 결과적으로 미국의 수출은 75%, 수입은 250% 증가하였다. {{sfn|Latner 2002|page=120}} <!--검증 필요: 1832년에 미국에서는, [[:en:USS Peacock (1813)|피콕 호]]에 승선하였던 [[에드먼드 로버츠]]에 의하여 [[조선]]의 통상 개방 문제가 논의된 바가 있다.-->
 
프랑스 뿐만성과는 아니라, 잭슨있었다. 정부는전임자 [[덴마크존 퀸시 애덤스]]이 실패했던 것과 대조적으로, [[포르투갈]]잭슨 정부는 영국과의 무역 조약을 성공적으로 협상하였던 것이다. 영국의 총리가 교체되었고, [[스페인]]과의또 영국의 무역 정책이 자유무역주의로 나아간 것에도 성공요인이 있었다. 이 조약으로, 약탈에미국의 따른상선들이 보상금서인도 청구도식민지들에서의 성공적으로무역을 합의하였다재개하였다.{{sfn|Latner 2002|page=120}} 또한, 잭슨 정부의 [[미국 국무부|국무부]]는 활발히 움직여서 [[니콜라이 1세|러시아 제국]] · [[스페인]] · [[마흐무트 2세|오스만 제국]] · [[영국]] · [[라마 3세|라따나꼬신 왕국]](1833년)과의 무역 조약의 체결을체결도 완수하였다. 영국과의 조약으로, 미국은 서인도 제도에서의 무역을 재개하였다. {{sfn|Latner 2002|page=120}} 라따나꼬신 왕국과의 무역 조약은 미국이 아시아 국가들과 맺은 최초의 조약이다. 결과적으로 미국의 수출은 75%, 수입은 250% 증가하였다. {{sfn|Latner 2002|page=120}} <!--검증 필요: 1832년에 미국에서는, [[:en:USS Peacock (1813)|피콕 호]]에 승선하였던 [[에드먼드 로버츠]]에 의하여 [[조선]]의 통상 개방 문제가 논의된 바가 있다.-->
그러나, 잭슨 정부는 [[도광제|청나라]] · [[에도 막부]]와의 무역을 개시하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sfn|Latner 2002|page=120}} 그리고 잭슨 정부는 남아메리카에서의 영국의 존재와 힘을 꺾지 못했다. 또한 [[멕시코]]로부터 [[텍사스]]를 500만 달러에 매입하려던 시도도 실패하였다.{{sfn|Latner 2002|page=120}} 주(駐)멕시코 [[임시대리대사]] [[:en:Anthony Butler (diplomat)|앤소니 버틀러]]는 텍사스를 무력으로 점령하자고 제안했지만, 잭슨은 이를 거절하였다. 버틀러는 잭슨의 집권 말기에 교체되었다.{{sfn|Latner 2002|page=120}}
 
그러나, 잭슨 정부는 [[도광제|청나라]] · [[에도 막부]]와의 무역을 개시하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sfn|Latner 2002|page=120}} 그리고 잭슨 정부는 남아메리카에서의 영국의 존재와 힘을 꺾지 못했다. 또한 [[멕시코]]로부터 [[텍사스]]를 500만 달러에 매입하려던 시도도 실패하였다.{{sfn|Latner 2002|page=120}} 주(駐)멕시코 [[임시대리대사]] [[:en:Anthony Butler (diplomat)|앤소니 버틀러]]는 텍사스를 무력으로 점령하자고 제안했지만, 잭슨은 이를 거절하였다. 버틀러는 잭슨의 집권 말기에 교체되었다.{{sfn|Latner 2002|page=120}}
1832년 3월, 보호구역에 있던 [[세미놀 족]] 수장들이 미국 정부와의 협상을 위해 소집되었다. ([[패인즈 랜딩 조약]] 참조) 7월에는 [[검은 독수리]]라고 불리는 인디언 추장이 백인마을을 습격하였다.
 
== 기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