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제1공화국: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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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선거에서 [[한국민주당]]의 지지를 받았으나, 초대 내각에 한민당 출신을 기용하지 않았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한민당 소속 정치인들은 [[민주국민당 (1949년)|민주국민당]]을 창당하고 대통령의 권력을 제한하는 [[의원 내각제|의원내각제]]를 지지하게 되었다. 한편 이승만은 통치기간 내내, 행정부의 통제를 확고히 하기 위한 추가 조치를 시행하려 하였다. 대통령으로서 이승만은 1950년에 한국전쟁이 일어나기도 전에 독재적인 권력을 휘둘렀다는 비판을 받게 된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건국헌법제헌헌법]] 제101조에 의거하여 국회에 반민족 행위 처벌법 기초 특별 위원회가 구성되고, 그해 [[9월 22일]] 법률 제3호로서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제정되었다. 반민특위가 구성된 1948년 10월부터 친일반민족행위자들에 대한 예비 조사를 시작으로 의욕적인 활동을 벌였으나 이승만 정부의 방해, 친일세력의 반민특위위원 암살 음모, 친일경찰의 6.6 특경대습격사건, 김구의 암살, 그리고 반민특위 법의 개정으로 [[1949년]] 10월에 해체되었다.
 
[[한국의 군정기|군정기]]였던 [[1948년]] 4월에 발생한 [[제주 4·3 사건]]은 제1공화국 당시에도 이어져 이에 대한 대량학살 등 여러 건의 대량학살이 이승만 정권 시기에 발생하였다. [[1948년]] [[10월 19일]]에는 전남 여수에서 [[여수·순천 사건]]이 일어난다. 중위 [[김지회]], 상사 [[지창수]]를 비롯한 일련의 [[남조선로동당|남로당]] 계열 장교들이 [[제주 4·3 사건]]진압 출동 명령을 거부하고 일으킨 반란은 [[10월 27일]] 완전히 진압되었고, 이후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대규모의 공모자 색출이 시작, 수천여 명에 달하는 민간인들이 반란 공모자로 몰려서 살해되었다. 이를 계기로 이승만의 반공주의 노선은 강화되어 갔으며 이승만은 육군본부 정보국 정보장교 [[김창룡]]으로 하여금 의심스러운 공산주의자와 북한의 첩보원을 체포하고 고문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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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에는 [[농지개혁법]]이 제정되었다. 당시 농민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농지개혁이었는데, 농민들의 농지및 토지개혁에 목소리가 높아지자 제1공화국 정부는 농지개혁법을 제정하게 된다. 농지 개혁의 주 내용은 '토지및 농지개혁제도는 토지상한선 3정보로 평년작 150%를 농지가격으로 환산하여 매수하는 유상매입과 지주에게 지가증권 발급하고 토지를 분배받은 농가는 5년간 수확물의 30%를 균분 연부하는 방식으로 정부에 상환하는 형식인 유상몰수로 불하한다.'는 주요 내용으로 법을 제정했다. 그러나 농지개혁법이 처음 제정되었을 당시, 지주 세력과 농민 세력 양측 다 반발하여 불만의 목소리가 높았다. 그렇게 됨으로써 [[1950년]] 3월달에 개정을 하게 되고, 5월에 농지개혁법을 실시한다. 그러나, 이때 곧바로 한국전쟁이 발발함에 따라 농지개혁법이 전면 실시는 지연됨으로써, 1953년에 본격적으로 시행을 하여 개인에 불하하도록 실시하였다.
 
1950년 1월 6일, 대한민국 정부는 비공개 회의를 가졌다. 그 내용은 1) 분쟁 발생시 미국이 한국을 도와줄 희망은 별로 없다는 것, 2) 미국은 [[타이완]] 방어를 위해 [[장제스]]를 도와주지 않을 것이라는 것, 3) 영국의 [[중화인민공화국]] 승인(1950년 1월 6일)은 서방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승인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었다. 이 내용이 1월 2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재 소련 대사 테렌티 스티코프를 통해 소련 외무부에 보고되기도 했다.<ref>{{뉴스 인용 |url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4072200289104006&editNo=5&printCount=1&publishDate=1994-07-22&officeId=00028&pageNo=4&printNo=1960&publishType=00010 |제목 = 러시아 ‘한국전쟁 관련 외교문서’<2> |출판사 =한겨레신문 |날짜 = 1994-7-22 |쪽 = 5 4|인용문 = <!-- ◇ 스탈린의 개전 동의 △ 1.29 = 슈티코프는 첩보로 수집된 남한 정부의 비공개회의(1.6)에서 나온 주요 내용을 외무성에 보고. 1) 분쟁 발생시 미국이 한국을 도와줄 희망은 별로 없음. 2) 미국은 대만방어를 위해 장제스를 도와주지 않을 것임. 3) 영국의 중국 승인(50.1.6.)은 서방의 북한 승인이나 마찬가지임.-->}}</ref>
 
한편, 제헌 국회의 임기가 끝날 무렵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정계는 물론이고 일반의 물의를 무릅쓰고 제2차 총선거 실시를 지연시키는 한편, 적자예산의 편성을 시도하였으나 당시 이를 반대하는 미국 국무장관 [[딘 애치슨]]의 각서 도달로 말미암아 정부에서는 종래의 주장을 변경하여 [[대한민국 제2대 국회의원 선거|제2대 국회의원 선거]]를 실시하였다.(1950년 5월 30일)<ref>{{뉴스 인용|url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508190032920200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5-08-19&officeId=00032&pageNo=2&printNo=2977&publishType=00020|제목 = 光復十年의 발자취(19) : 六 · 二五事變|날짜 = 1955-8-19|출판사 = 경향신문|쪽=2|인용문 = <!--制憲國會의 任期가 끝날 무렵 政府에서는 政界는 勿論이요 一般의 物議를 무릅쓰고 第二次總選擧實施를 遲延시키는 한편 赤字豫算의 編成을 試圖하였으나 當時 이를 反對하는 美國務長官「애치슨」氏의 覺書到達로 말미암아 政府에서는 從來의 主張을 變更하여 五 · 三十選擧를 實施하였던 것이다. --> }}</ref> 선거의 결과 무소속 의원이 국회 의석의 과반수를 점하여 압도적인 우세를 보이고 몇몇 중간파 의원들이 두각을 나타냈으며, 정부측 여당의 진출은 미미했다. 북조선은 이에 대해, 1949년 6월에 제정되어 선거 직전인 1950년 4월에 시행규칙을 공포한 [[농지개혁법]]이 유상매수(有償買收) · 유상분배(有償分配)를 원칙으로 하고 있으므로 사실상 토지개혁의 의의가 희박하여, 국민이 노골적으로 정부에 반감을 표시한 결과라고 속단하고 이때에 남침을 감행하면 틀림없이 남한 국민의 지지를 얻을 것이라고 판단하였다.<ref>《[[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현대사회의 발달/시련과 민주주의의 발전/6·25전쟁#전쟁발발 직전의 정황|전쟁발발 직전의 정황]]〉 <!--“1950년 6월은 바로 대한민국 제헌국회의 임기가 만료되어 제2대 국회를 구성하기 위한 5·30총선거를 치른 직후였다. 선거의 결과 무소속 의원이 국회 의석의 과반수를 점하여 압도적인 우세를 보이고 몇몇 중간파 의원들이 두각을 나타냈으며, 정부측 여당의 진출이 미미했던 것이다. 이것은 1949년 6월에 제정되어 선거직전인 1950년 4월에 시행규칙을 공포한 남한의 토지개혁법이 유상매수(有償買收)·유상분배(有償分配)를 원칙으로 하고 있으므로 사실상 토지개혁의 의의가 희박하여, 국민이 노골적으로 정부에 반감을 표시한 결과라고 속단하고 이때에 남침을 감행하면 틀림없이 남한 국민의 지지를 얻을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했던 것이다.”--></ref> 1950년 6월 19일의 [[대한민국 제2대 국회]] 개원식에서는 [[존 포스터 덜레스]]가 참석하기도 하였다.<ref>{{뉴스 인용|url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508190032920200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5-08-19&officeId=00032&pageNo=2&printNo=2977&publishType=00020|제목 = 光復十年의 발자취(19) : 六 · 二五事變|날짜 = 1955-8-19|출판사 = 경향신문|인용문 = <!-- 이렇듯 是非曲절 끝에 五 · 三十選擧가 實施되었고 1950년6월19일 열린 개원식에는 현미국무장관 「떨레스」씨가 참석하는 등 아세아의 민주보루로서 洋洋한 앞날이 약속되었던 것이다.--> }}</ref> 이날 국회가 의장단 선출을 시작으로 활동을 시작하자마자 [[한국 전쟁]]이 일어났다.
 
=== 한국 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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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전쟁 중의 정치 ====
1950년 총선에서 무소속 후보가 대거 당선되고, [[거창 양민 학살 사건|거창 양민학살사건]]과 [[국민방위군 사건]] 등으로 이승만 정부는 지지 기반이 약화되어갔다. 1950년 9월 28일, 수복 후 일부 장관들의 경질에 따라 법무부 장관에 [[김준연]], 농림부 장관에 [[공진항]], 사회부 장관에 [[허정]], 문교부 장관에 [[백낙준]], 보건부 장관에 [[오한영]]이 임명되었다. 이들 중에서 [[민주국민당 (1949년)|민주국민당]] 출신 김준연과 [[장기영 (1903년)|장기영]]의 입각은 제헌국회 말기 1950년 3월 내각책임제 개헌운동 때 이들이 야당 대열로부터 이탈한 것에 대한 이승만 대통령의 논공행상이 반영된 것이었으며, 민주국민당의 [[조병옥]]은 [[워커]] 미군 사령관의 적극적인 추천에 의한 것이었다. 또한 교통부의 [[김석관]] 장관은 차관 시절 전쟁의 와중에서 무기 및 병력수송의 공로와 기관차 한 대도 북한군의 손에 넘겨 주지 않은 투철한 책임의식에 대한 평가로 발탁되었다.<ref>{{서적 인용 |저자= 연시중|제목= 한국 정당정치 실록 1권 |연도= 2001|출판사=지와사랑 |위치= |id= |쪽=222}}</ref> [[1950년]] 12월 [[미국]]에 체류중인 [[장면]](張勉)을 [[대한민국의 국무총리|국무총리]]로 내정하였다. 당초 이승만은 장면에게 인사권을 위임하겠다고 하였으나, "5석 중 3석을 총리가 정하였으니 [[대한민국 내무부|내무]]에는 [[이순용]], [[대한민국 국방부|국방]]에는 [[이기붕]]을 써 주시오"하고 종용하자 [[장면]]은 받아들이고 말았다.<ref>장면, 《한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가톨릭출판사, 1999 증보판) 436페이지</ref> [[이범석 (1900년)|이범석]]으로 하여금 [[자유당 (대한민국)|자유당]]을 창당케 하여, [[1951년]] [[11월 19일]] 독립촉성중앙회를 기초로 자유당이 창당되고 이승만은 자유당 총재직을 수락하였다(→[[자유당 (대한민국)|자유당]] 참조). 전쟁이 계속됨에 따라 대한민국의 임시 수도였던 부산에서는 [[1952년]] [[5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이 자신의 재선과 독재정권 기반을 굳히기 위해 [[계엄|계엄령]]을 선포하고 폭력을 동원, 강제로 국회의원을 연행하고 구속시킨 [[부산 정치 파동]]이 있었으며, [[1952년]] 5월 군부 내에서는 이승만 축출 시도가 있었다.<ref name="대일">[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1998051570380 [박정희 생애&#93; 제6부 쿠데타 연습-이승만제거계획(2) - (183) - 조선닷컴 인물<!-- 봇이 붙인 제목 -->]</ref> [[이용문 (군인)|이용문]]과 [[박정희]] 등 군부의 일부는 이승만을 축출하고 장면을 추대하려는 시도를 계획<ref name="대일"/> [[이용문 (군인)|이용문]]은 장면의 비서로 있다가 [[1952년]] 4월 사퇴한 [[선우종원]]을 포섭하려 하였으나 선우종원의 협조거부로 무산되었다.<ref name="대일"/> 이승만은 군부내 평안도 인맥을 지칭이 평안도 출신인 장면 전 총리와 결탁한다는 소문을 접하였고<ref name="평안">[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1998051870441 [박정희 생애&#93; 제6부 쿠데타 연습-이승만제거계획(4) - (185) - 조선닷컴 인물<!-- 봇이 붙인 제목 -->]</ref> 이때 부산지역에 계엄령을 내렸으나 [[이종찬 (군인)|이종찬]] 등은 군의 정치적 중립을 들어 이승만의 요구를 거절하였다. 이승만은 이종찬을 해임하려 하였으나 밴플리트 등의 만류와 전황으로 무산되었다.<ref name="평안"/>
 
임시수도 부산에서 이승만은 [[대한민국 헌법 제2호|발췌개헌]]을 시도하여 개헌안이 [[1952년]] [[7월 4일]] 국회에서 통과되고 [[7월 7일]] 공포되도록 함으로써 대통령 직선제를 이끌어 냈다. 이로써 대통령 선거 방법을 간접선거에서 직접선거로 바꾸었고, 이에 따라 1952년 [[8월 5일]] 국민들의 직접선거에 의해 실시된 [[1952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 후보가 제2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또한 부통령 선거에서는 개헌의 1등 공신인 부통령 후보이자 족청계의 지도자인 [[이범석 (1900년)|이범석]]을 떨어뜨리고 [[함태영]]을 당선시키는 데 앞장섰다.<ref>1952년 8·5정부통령~당선시키는 데 앞장섰다.: 안희수, 〈서론:정당의 형성이론과 한국정당의 발전과정〉,안희수 편저,《한국정당정치론》(나남, 1995),59쪽.</ref>([[자유당 (대한민국)|자유당]]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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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 승인을 구하는 외교 ===
[[파일:Changmyon-Chobysambd.jpg|thumb|300px|right|[[1948년]] 12월 [[파리]] UN총회에 파견된 [[대한민국]] 정부 대표단. 맨 앞줄 왼쪽이 [[조병옥]], 가운데는 대표단장 [[장면]], 왼쪽은 [[장기영]], 뒷줄은 왼쪽부터 [[정일형]], [[모윤숙]], [[김활란]], 성명 미상, [[김우평]]]]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국가 승인을 얻기 위한 외교전이 펼쳐졌다. 1948년 9월 9일, 중앙청 앞뜰에서, 건국정부 수립 후 처음으로 해외에 파견되는 [[장면]], [[조병옥]] 두 특사의 장도를 축하하는 애국청년연합회 주최 환송회가 성대히 열렸다. 이 환송회에서 두 특사는 "하느님의 도움을 받아 소기의 목적을 기필코 달성하고 오겠다"고 다짐한 뒤 상오 11시5분쯤 [[노스웨스트 항공]] DC4기로 김포공항을 떠났다.<ref>{{뉴스 인용 |url =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5030300329204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5-03-03&officeId=00032&pageNo=4&printNo=9056&publishType=00020 |제목=秘錄 韓國外交<22> : 政府樹立 직후(4) |출판사= 경향신문 | 날짜 = 1975-3-3 |인용문=48년 9월 9일. 중앙청 앞뜰에서는 건국후 처음으로 해외에 파견되는 張勉, 趙炳玉 두 特使의 장도를 축하하는 愛國靑年聯合會 주최 환송회가 성대히 열렸다. 이 환송회에서 두 特使는 "하느님의 도움을 받아 소기의 목적을 기필코 달성하고 오겠다"고 다짐한 뒤 이날 상오 11시5분쯤 NWA DC4機로 金浦공항을 떠났다.}}</ref> 한국 대표단은 1948년 12월 7일~ 12월 12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3차 [[국제 연합 총회]]에 참석하였다. 이들은 [[대한민국]]의 유엔승인을 위한 홍보사절로서 그 구성원은 [[장면]](단장), [[조병옥]], [[장기영 (1903년)|장기영]], [[김활란]], [[정일형]], [[전규홍]], [[김우평]], [[김준구]]였다.<ref>{{뉴스 인용 |url =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2080800329102004&editNo=3&printCount=1&publishDate=1962-08-08&officeId=00032&pageNo=2&printNo=5160&publishType=00010|제목 = 歷代유엔總會韓國代表團 |출판사= 경향신문 | 날짜 =1962-8-8 }}</ref>
 
=== 대북 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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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철저한 반일주의자였다는 주장이 있다.<ref name="유264"/> 이승만은 반세기에 걸친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을 통하여 나타난 [[대한민국|한국]]에 대한 일본의 야욕은 패전한 뒤에도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과의 교류, 무역 등을 철저히 배격할 정도였다는 것이다.<ref name="유264"/> 이에 따라, 일본에 대한 외교정책은 시종일관 [[반일 감정|반일]](反日)노선과 경계를 지향하였다. 대표적인 사례로 [[평화선]]과 보상 요구 문제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일본에 대표부를 파견하여 연락을 유지하였고, 이는 이승만 퇴진 후 주일 한국 대사관으로 승격되었다. [[한국 전쟁]] 당시 미국에서 일본군의 개입을 천명하자, 이승만은 주한 미국 대사에게 일본군이 개입하면 일본군부터 먼저 축출할 것이라고 하여 [[일본군]] 참전을 취소시켰다. 한편 서울이 점령되었을 무렵, 이승만은 일본에 임시 망명정부를 수립할 계획도 고려하고 있었다.{{출처|날짜=2010-10-31}}
 
1954년 [[3월 27일]]에는 국내에 유통중인 일제상품 몰수를 지시했고, 1955년 6월 20일에는 일본제품 특혜수입 금지령을 내렸다. 한편 [[일본]]인을 만났다는 이유로 [[대한민국의 국무총리|국무총리]] [[장택상]]을 해임시키기도 했다. [[독도]] 문제로 일본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1945년]] [[9월 27일]] 미국이 일본어업의 조업구역으로 설정한 '맥아더 라인'이 1951년 9월 8일 샌프란시스코 미일평화조약이 1952년에 발효됨에 따라 무효화되자, 이승만은 이를 대체할 법안으로 당시 한국과 일본과의 어업분쟁에서 대한민국의 주장에 의한 방위 수역을 설정했다. '''평화선'''(Peace Line, Syngman Rhee line)은 1952년 1월 18일 대한민국의 대통령 이승만이 대통령령 ‘대한민국 인접해양의 주권에 대한 대통령의 선언’을 공표함으로써 설정된 한국과 주변국가간의 수역 구분과 자원 및 주권 보호를 위한 경계선이다.<ref name="대일">[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1998051570380 [박정희 생애&#93; 제6부 쿠데타 연습-이승만제거계획(2) - (183) - 조선닷컴 인물<!-- 봇이 따온 제목 -->]</ref> 한반도 주변 수역 50-100[[해리 (단위)|해리]]의 범위를 가지고 있는 이 경계선은 오늘날 [[배타적 경제 수역]]과 비슷한 개념이다. 이렇게 해양 경계선이 획정되었는데 이승만은 이를 "평화선"이라 불렀다. 이 경계선은 [[독도]]를 대한민국의 영토로 포함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이승만 라인’(李承晩ライン)으로 부른다.
 
이 선언은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 선언에 대해 미국과 일본은 반대하였다. [[2월 12일]] [[미국]]은 이승만의 평화선을 인정할 수 없다고 이승만에게 통보해왔으나<ref name="대일"/> 이승만은 이를 묵살하였다. 특히 당시 [[일제 강점기|일제강점기]] 이후 외교관계가 정상화 되지 않았던 일본과는 어로 문제, 독도를 포함한 해양 영토 문제로 이후 13년간의 분쟁을 불러일으켰다. 한국은 일본과 중국의 불법 조업 어선을 여러 차례 나포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어업 종사자가 죽기도 하고, 한국 경찰관이 중국에 납치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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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후원한 [[중화민국]]과는 1948년 8월 수교하였다. 이것은 대한민국으로서는 세계 최초의 외교관계 수립이었다. 정부승인 외교를 위해 조병옥, 장면 두 특사를 세계 각국에 파견한 이승만 대통령은 우방과 어떤 형태로든 외교관계를 맺어 새로 수립된 정부가 국제적 고립을 면해야 한다는 집념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따라서 재외공관 설치작업을 서두르게 된 이승만은 우선 맹방인 중국에 특사관(特使館)을 설치하도록 지시했다.<ref name="비록한국외교 26"/>
 
1948년 11월 이승만은 [[정환범]](鄭桓範)을 주중화민국 특사로 임명했다. 정환범은 미군정 때, [[신한공사]] 총재를 지낸 인물로, 외무부 장관 [[장택상]]은 그의 선임을 반대하기도 하였다. 또한 대한민국 정부는 특사관 창설을 위해 [[이정방]](李鼎邦) 참사관, [[최문경]](崔文卿) 1등서기관, [[한유동]](韓有東) 주사 등 3명을 선발대로 중화민국의 [[난징 시|난징]]에 파견했다. 이 참사관 이하 세 사람의 선발대는 서울-상하이 간을 1주일이 한 번 비행하는 노스웨스트항공의 DC4기편을 이용, 김포공항을 출발(정 특사는 그보다 1주일 후에 출발하였다.)하여 상하이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상하이의 교포들에게 특사관 창설을 알리고 사무실, 집기 등을 마련한 뒤 11월 6일 공관 설치를 위해 난징에 도착하였다. 선발대가 난징에 도착했을 때 그들이 처한 중국의 정세는 심각했다. 양쯔 강을 사이에 두고 국부군과 공산군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었는데다가, 일행이 난징에 도착하고 며칠 후 난징이 함락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당사 외교사절단 단장인 주 중화민국 프랑스 대사가 매일 전황 브리핑을 해 주고 있었는데 양자강 건너편 공산군은 사기가 충천되어 있었고, 국부군은 패색이 짙어 있었다. 중화민국 외교부의 안내로 투숙하게 된 호텔인 예빈관 3층방에 사무실을 차리고 11월 7일 창밖에 "대한민국 주중특사관"(大韓民國 駐中特使館)이라고 붓글씨로 쓴 현판을 걸었다. 이 특사관은 건국정부 수립 후 최초의 재외공관이었고, 대한민국의 선발대는 중화민국의 서른여섯번째 외교 사절이었다. 그러나 [[마오쩌둥]]의 [[중국 공산당|공산당]]에 밀려 본토로부터 타이완까지 1만여리를 철수하는 [[중국 국민당|국민당]]의 피난길을 따라나서야 했기 때문에 재외공관 중 "피난 공관"으로 가장 큰 고초를 겪기도 했다.<ref name="비록한국외교27">{{뉴스 인용 |url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5031400329204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5-03-14&officeId=00032&pageNo=4&printNo=9066&publishType=00020| 제목 = 秘錄 韓國外交<27> : 政府樹立 직후 ⑨ 飛行機에 懸板싣고| 날짜 = 1975-3-14 | 출판사 = 경향신문}}</ref>
 
1949년 10월 1일 중국 공산당은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을 선포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은 [[대한민국]]이 아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승인하였고 따라서 대한민국은 [[타이완]]의 [[중화민국]]과 수교 상태를 유지하였다. 중화민국과는 달리, 중화인민공화국은 1950년 10월 국제연합군에 대항하여 [[한국 전쟁]]에 [[중국인민지원군]]을 파견하였다. 이들은 38도 주변 지역의 북쪽에서는 국제연합군을 몰아내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그 이남 지역에서의 공세는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중국인민지원군은 1953년 휴전 이후에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잔존하다가 1958년에 완전히 철수하였다. 이는 [[냉전]] 시대에 [[공산주의 국가]]인 [[중화인민공화국]]과 [[자본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이 적대적 관계가 되는 원인이 되었으며, 대한민국으로서는 한국의 [[독점적 통치권]]을 침해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승인하는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할 수가 없었고, 또한 중화인민공화국으로서도 적국인 중화민국과 긴밀한 관계에 있는 대한민국과 수교할 수가 없었다.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은 중화민국과 각각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한중간 공식적인 관계의 부재는 양국의 교역을 증대시키는 데 걸림돌이 되었다. 대한민국은 합법적으로 중화인민공화국 내의 자국 국민과 기업의 이익을 보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