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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유표'''(劉表, [[142년]]<ref name=a/> ~ [[208년]] [[음력 8월|8월]]<ref name=a/>)는 [[중국]]의 [[후한]] 말의 정치가로, [[자 (이름)|자]](字)는 '''경승'''(景升)이며 [[연주 (중국)|연주]](兗州) [[산양군]](山陽郡) 고평현(高平縣)<ref>현재 [[산동성]] · [[하남성]]의 경계.</ref> 사람이다. [[전한 경제|경제]](景帝)의 4남 [[유여 (사람)|노공왕 유여]](魯恭王 劉餘)의 후손으로, 유여의 아들 욱랑후 유교(郁桹侯 劉驕)의 9대손이다.<ref>[[임보]](林寶), 《[[원화성찬]]》(元和姓纂) 권5</ref>
|이름= 유표(劉表)
|그림=
|그림설명=
|출생일= [[142년]]
|출생지= [[산양군]] 고평현(지금의 [[산둥성]] [[웨이산 현]])
|사망일= [[208년]] 8월([[음력]]) (67세)
|사망지= 양양
|사망원인= 병사
|국적= [[후한]]
|별칭= 자(字)는 경승(景升)
|경력= 대장군연 → 북군중후 → 형주자사 → 겸 안남장군? → 형주목 겸 진남장군
|직업= [[정치가]]
|작위= 성무후
|자녀= [[유기 (후한)|유기]](장남)<br />[[유종 (후한)|유종]](차남)
|관련활동= [[형주]]에서 독자 세력화
}}
'''유표'''(劉表, [[142년]] ~ [[208년]] 8월([[음력]]))는 [[중국]]의 [[후한]] 말의 [[정치가]]로 [[자 (이름)|자]](字)는 경승(景升)이며 [[연주 (중국)|연주]] [[산양군]] 고평현(高平縣) [[사람]]이다. [[전한 경제]]의 10대손이다.
 
== 생애 ==
=== 형주 부임 ===
처음에는 [[대장군]] [[하진]](何進)을 섬겼다. [[후한 영제|영제]](靈帝) 사후, 칙서에 따라 장사태수 [[손견]](孫堅)에게 살해당한 형주자사(荊州刺史) [[왕예]](王叡)의 후임으로 임명되어 임지로 향했다.<ref>진수가 쓴 《[[삼국지]]》 본문에 [[배송지]]가 추가한 주석에서는 유표에게 칙서를 내린 날짜는 있으나, 칙서를 내린 주체가 누구인지는 명기되어 있지 않았다.
노공왕(魯恭王) [[유여 (사람)|유여]]의 [[아들]] 욱랑후 유교(郁桹侯 劉驕)의 9대손이다.<ref>임보(林寶), 《원화성찬》(元和姓纂) 5권 고평(髙平)</ref> [[키]]는 8[[척]]에 달하고 풍모는 위엄이 있었다. [[왕창 (후한)|왕창]](王暢)에게서 [[학문]]을 사사하였다.<ref>[[사승]], 《후한서》 ; [[배송지]] 주석, 《삼국지》6권 위서 제6 유표에서 인용</ref> [[환관]] 세력에 반발했으며 젊어서부터 [[이름]]이 나 [[팔급]] 혹은 [[팔고]] 중 한 명이었다.<ref>《후한서》67권 열전 제57 당고. 《삼국지》 유표전에서는 [[팔준]]이라 하였으나 《후한서》를 따른다.</ref> [[당고의 화]]를 당해 숨어 지냈다. 당금이 풀려서야 [[대장군]] [[하진]]의 연(掾)과 북군중후(北軍中候)를 지냈다.
;관련된 기술
:《삼국지》 위서 무제기 등에 따르면, 영의 서거는 [[189년]] 4월의 일이었고, 후한 조정의 실권을 장악한 대장군 하진도 같은해 8월에 환관에 의해 살해되었다.
:《[[후한서]]》 유표전에 따르면, 유표에게 형주 자사 취임의 칙서를 내린 것은 190년 형주 자사 왕예가 손견에 의해 살해당한 후의 일이라고 한다.
:《삼국지》 오서 손파로토역전에 따르면, 왕예는 손견에 의해 살해당할 때까지 형주 자사직을 맡고 있었다. 주석 〈[[왕씨보]]〉에서도 그와 같은 얘기가 확인되었다.
:《삼국지》 위서 동탁전에 따르면, 190년 당시 조정의 실권을 장악한 이는 동탁이었다.
:《삼국지》 촉서 유언전-주석 속한서에 따르면, 유표가 형주목이 된 시기를 유언이 익주목이 된 188년으로 보고 있다. 배송지는 이 기술에 대해 유표가 형주의 장관이 된 것은 영제 사후, 왕예가 손견에 의해 살해당한 후에 이루어진 것으로 추측하여 기술하였다.
:《유진남비(劉鎭南碑)》에서는 유표가 형주자사로 부임한 시기를 [[초평]](初平) 원년([[190년]]) 11월이라고 하였다.</ref>
 
당시 [[장강190년]]([[초평]] 이남에는원년) [[형주]][[자사 종적(宗賊관직)이라는|자사]] 도적떼가[[왕예]]가 들끓었고,[[장사군|장사]][[태수]] 토호들은[[손견]]에게 후한[[살해]]당하여 조정의 지배를후임으로 거부하여임명되었다. 제멋대로소대(蘇代)가 할거하고장사에서 있었다.일어나 유표는패우(貝羽)를 화용[[현령|현장]](華容―)으로 삼는 등 [[장강]] 이남의 토호들이 할거하는 때문에바람에 장강 이남에 있는 본래 형주의 주도(州都) 한수[[무릉군]] 한수현(漢壽)<ref>[[무릉군사마표]], 속현.《[[속한지]]》(續漢志) 22권 군국 제4 형주 무릉군</ref>으로 부임하지내려가지 않고못하고 홀로 [[남군 (중국)|남군]] [[이청 시|의성]]현(宜城)<ref>남군의으로 속현들어갔다.</ref>으로 들어가, 남군 지역의 유력 호족인[[호족]]인 [[채모]](蔡瑁) ·, [[괴월]](蒯越) ·, [[괴량]](蒯良) 등을 직접 방문하여 그들의 조력을 얻는얻어 궐기한 성공했다. 그리고 이들의 조언에 따라 종적들의토호들의 우두머리를 유인하여 살해하고처단하고 그 휘하 무리들을 흡수했다. 강하의 도적오직 장호(張虎)와 진생(陳生)만이 [[샹양 시|양양]](襄陽)<ref>[[남군성을 점거하고 버텼는데 괴월과 방계(중국龐季)|남군]]의 속현이며,하여금 현재설득하니 [[호북성항복]] 양번시 북부에 있었다.</ref>성을 점거하자, 사람을 보내 항복시켜하여 마침내 강남 일대를 지배하에 두는 데 성공한다. 이후 양양을 주도로 삼고 통치했다평정하였다.<ref>[[사마표]]:, 《전략》 (진수의戰略) 삼국지; 위서배송지 권6주석, 동2원유전《삼국지》6권 위서 유표전의제6 배송지유표에서 주석에서 재인용)인용</ref> 양양을 주도로 정해 통치하고 [[반동탁 연합군]]에 합류하였다.
 
=== 원술 방어 ===
[[190년]] 각지에서 반동탁연합의 의병이 일어나자 유표도 참가하였다.<ref>《삼국지》 위서 권6 동2원유전 중 동탁전에 따르면, 같은 시기 동탁은 주밀, 오경의 천거를 받아, 각주 자사를 인사 혁신하였다. 그러나 임명된 자들-[[한복 (후한)|한복]](韓馥) · [[유대 (후한)|유대]](劉岱) · [[공주 (후한)|공주]](孔伷) · [[장자 (후한)|장자]](張咨)-은 동탁을 배신하고 반동탁 의병을 일으켰다.</ref> [[192년]] 남양에 웅거한 [[원술]](袁術)이 손견으로 하여금 유표를 공격하게 했다. 이 싸움에서 유표 수하의 강하태수(江夏太守) [[황조]](黃祖)가 패하여 양양성이 직접 포위당하는 지경까지 몰렸으나, 황조의 군사가 쏜 화살에 손견이 죽어 위기를 넘겼다. 그리하여 유표는 마침내 원술의 침략을 저지했다.<ref>[[진수 (서진)|진수]]: 《[[삼국지]]》 권56 손파로토역전 중 손견전</ref><ref name="s6-l">위와 같음, 권6 동2원유전 중 유표전</ref>
[[191년]] 반동탁 연합군은 분열하여 [[남양군 (중국)|남양]]태수 [[원술]]과 [[기주]]목 [[원소 (후한)|원소]]가 서로 싸웠다. 유표는 원소와 손잡았다. 원술이 손견을 시켜 형주로 [[양양 전투|쳐들어]]오기에 [[황조]]를 보내 요격하였으나 [[번성]](樊城)과 등성(鄧城) 사이에서 격파당하였다. 손견은 [[한수이|한수]]를 건너 양양을 [[포위]]하고 현산(峴山)으로 달아난 황조를 쫓다가 [[화살]]에 맞아 죽었다.<ref>《삼국지》46권 오서 제1 손견</ref> 이로써 원술을 저지했다. [[192년]]<ref>《후한서》9권 본기 제9 효헌제 유협 초평 3년</ref> [[이각 (후한)|이각]]과 [[곽사]]가 [[장안]]의 정권을 장악하였다. [[겨울]], 조정에 공물을 바치니 이각 등이 유표의 지원을 받고자 [[종요]]를 보내서 [[황제]]의 백부(伯父)라 부르며 성무[[제후|후]](成武侯)에 봉하고 가절(假節), 진남장군(鎭南將軍), 형[[자사 (관직)|주목]]에 임명하여 [[북]], [[피리]], 큰 [[수레]]를 주었다. [[삼공 (칭호)|삼공]]처럼 개부하여 [[장사 (관직)|장사]], [[사마 (벼슬)|사마]], 종사중랑(從事中郞) 등 속관도 둘 수 있게 됐다.<ref>〈유진남비〉(劉鎭南碑) ; [[채옹]], 《채중랑집》(蔡中郞集)에서 인용. 〈유진남비〉에서는 유표가 진남장군 이전에 형주목 겸 안남장군을 역임했다고 하였다. 또 종요의 관직을 어사중승(御史中丞)이라 하였는데 종요는 [[195년]] 이후에 어사중승이 된다. 하지만 《자치통감》60권 한기 제52 헌제 초평 3년에서는 유표가 진남장군이 된 시기를 192년이라 하였다.</ref> [[193년]] 원술의 보급로를 끊어 원소와 협력하던 [[조조]]를 도왔다. 원술이 조조에게 패해 [[구강군|구강]]으로 달아났다.<ref name='토익'>《삼국지》1권 위서 제1 무제 조조</ref>
 
=== 조조 견제 ===
[[192년]] [[겨울]]에 조정에 공물을 바쳤고, [[193년]] [[이각 (후한)|이각]](李傕)이 실권을 장악한 조정에서 가절(假節), 진남장군(鎭南將軍), 형주목(荊州牧)으로 승진하고 성무[[제후|후]](成武侯)에 봉해졌다. 이는 유표의 도움을 받고자 하는 속셈이었다.<ref name="s6-l"/><ref name="h74b-l">[[범엽]]: 《[[후한서]]》 권74하 열전제64하 중 유표전</ref> 같은해 원술과 조조가 다투자 원술의 보급로를 끊어 원소와 협조관계에 있던 조조를 지원하였다.<ref>《삼국지》 무제기의 기술.</ref>
[[196년]]([[건안]] 원년)<ref>《후한서》9권 본기 제9 효헌제 유협 건안 원년</ref> [[헌제]]가 [[낙양]]으로 환도하면서 종전에 [[동탁]]에 의해 파괴된 궁실을 수리하려 하였다. [[조기 (빈경)|조기]]가 와서 [[조세]]를 재촉한 즉시 병사를 보내 수리를 돕고 물자를 끝없이 실어날랐다.<ref>《후한서》64권 열전 제54 조기</ref> [[허창|허]]로 [[도읍]]을 옮겼을 때도 공물을 바쳤다. 이번에는 조조와 원소의 틈이 벌어졌다. 치중(治中) 등희(鄧羲)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원소와 연합했다.
 
[[장제 (후한)|장제]]가 굶주림에 빠져 [[홍농군|홍농]]에서 남양으로 와 양성(穰城, 지금의 [[허난성]] [[덩저우 시]])을 공격하다 유시(流矢)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유표가 “장제가 궁박해서 왔는데도 주인이 빈객에 대한 예를 제대로 하지 않아 싸움에 이르고 말았다. 이는 나의 뜻이 아니니 하례가 아닌 조문을 받겠다.”며 그 무리를 받아들였다. 장제의 [[조카]] [[장수 (후한)|장수]]가 완(宛)에 주둔하였다.<ref>《삼국지》8권 위서 제8 장수</ref> [[197년]] 남양·장릉(章陵)을 두고 장수와 연계해서 조조군과 다투었다. [[198년]] 조조가 친정하여 양현에 있던 장수를 포위하자 그 뒤로 군을 보내 구하였다.<ref name='토익' /> 이 무렵 공물을 끊고 천지에 [[제사]]지냈다.<ref>《삼국지》70권 열전 제60 [[공융]]</ref>
[[197년]] 양현(穰縣)<ref>[[하남성]] 남양 주변. </ref>에 장제가 쳐들어왔으나, 유시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유표는 장제의 군사를 들여보내게 하였고, 이후 장제의 군사를 거느린 조카 [[장수 (후한)|장수]]와 동맹을 맺었으며, 장수를 도와 [[조조]]와 싸웠다. 장사태수 장선(張羨)이 [[장사국|장사]](長沙) · [[무릉군|무릉]](武陵) · [[영릉군|영릉]](零陵) · [[계양군 (중국)|계양]](桂陽) 4군을 들어 유표에게 항거하고 조조에게 투항하자, 유표는 장선을 공격하였으나 몇 년이 지나도록 거꾸러트리지 못했다. 장선이 얼마 못 가 병들어 죽자, 유표는 그 뒤를 이은 아들 장역(張繹)의 세력을 아울렀다. 이로써 유표는 남으로 영릉 · 계양, 북으로 한천을 거두어 땅이 수천 리에 달하고, 병력은 10여 만에 이르렀다.
 
=== 남방 전역 ===
이후 조정에서는 어사중승(御史中丞) [[종요]](鍾繇)를 유표에게 파견하여 유표를 진남장군(鎭南將軍)에 임명하였고, 북 · 피리 · 큰 수레를 하사하는 한편 조칙을 내려 '''백부'''(伯父)라는 존칭을 주었다. 또한 진남장군의 밑에 장사(長史) · 사마(司馬) · 종사중랑(從事中郞) 등의 속관을 두었고, 부를 열어 인재를 초빙할 권한을 주는 등 격식을 삼공(三公)과 같이 하였다. 또한 좌중랑장(左中郞將) 축탐(祝耽)을 보내 부절을 주어 위엄을 더하였고, [[교주]](交州) · [[양주 (揚州)|양주]](揚州) · [[익주]](益州)를 다스리도록 하였다.<ref name=a>[[채옹]](蔡邕), 《채중랑집(蔡中郞集)》 권3 유진남비(劉鎭南碑)</ref>
장사태수 장선(張羨)이 장사, [[영릉군|영릉]], [[계양군 (중국)|계양]] 3[[군 (행정 구역)|군]]을 들어 조조와 통하고<ref>《삼국지》22권 위서 제22 [[환계]]</ref> 유표에 대항하였다. [[199년]] 장수마저 조조에게 굴복하였다.<ref name='토익' /> 여강태수(廬江―) [[유훈 (후한)|유훈]]은 [[손책]]의 거짓 동맹에 속아 여강을 뺏기고는 유표에게 급히 원병을 청하였다. [[황역]]이 달려갔지만 반전하지 못하고 [[강하군]] 사이현(沙羡縣, 沙羨縣)까지 손책에게 유린당하였다.<ref>《강표전》(江表傳) ; 배송지 주석, 《삼국지》46권 오서 제1 손책에서 인용</ref> 한희(韓晞)와 조카 유호(劉虎) 등 많은 [[사람]]이 죽었다.<ref>《오록》(吳錄) ; 배송지 주석, 《삼국지》46권 오서 제1 손책에서 인용</ref> [[200년]]<ref>《[[자치통감]]》63권 한기 제55 헌제 건안 5년</ref> 원소에게서 [[관도 전투]] 지원을 요청받았으나 장선과 싸우느라 도울 여유가 없었다. 장선이 [[질병|병]]들어 죽어서야 그 아들 장역(張懌)을 이기고 몇 년 만에 병합하였다. 조카 [[유반]]이 손책이 확보한 예장(豫章)을 수차례 침범하였다.<ref>《삼국지》49권 오서 제4 [[태사자]]</ref>
 
=== 작은 평화 ===
[[200년]] [[관도 전투]]에서는 원소에게서 구원을 요청받았으나, 이에 응하지 않았다. 그 후 여남에서 유비가 몸을 의탁해 오자, 그를 받아들였다. 조조가 요동에 원정한 사이, 유비는 조조의 본거지를 급습하자고 진언하였으나, 움직이지 않았다. 조조의 침공을 대비하기 위해 유비를 [[신야]](新野)<ref>현재 하남성 남양시 신야현. </ref>에 주둔시켰다.
남으로는 영릉과 계양, 북으로는 한천(漢川)을 아울러서 [[땅]]은 수천 [[리]]요, 병력은 10여 만에 이르렀다. 천하가 거세게 요동치던 때 유표는 위엄과 회유를 적절히 섞어 침착하게 통치하면서 [[형주]]를 안정시켰다. 관서, [[연주 (중국)|연주]], [[예주]]의 학사 수천 명이 모여들었고 유표는 이들을 구휼하여 [[학교]]를 세우고 [[유교|유학]]을 장려하였다. 유예(劉叡)와 [[천문]][[서적]] 《형주점》(荊州占)을 편찬하였고<ref>《[[진서]]》12권 지 제2 천문中 잡성기(雜星氣)</ref> 기모개(綦母闓) 혹은 기무개(綦毋闓)와 [[송충 (후한)|송충]] 등은 《오경장구》(五經章句)를 편찬하여 《후정》(後定)이라 하였다.
 
[[괴월]]과 종사중랑 [[한숭]](韓嵩), 별가(別駕) 유선(劉先)이 ‘[[조조]]는 명철하게 용병을 잘하며 인재도 많이 모았기 때문에 [[원소 (후한)|원소]]를 잡을 것’이라며 조조에게 귀부하자고 권하였다. 의심이 든 유표가 한숭을 조조에게 보내 그 허실을 둘러보게 하였다. 한숭이 재차 조조에게 순종할 것을 권하며 ‘자신이 사절로 가 황제에게 관직이라도 받으면 그때부터는 유표가 아닌 황제의 신하가 되는 것’이라 하는데도 기어이 보냈다. 과연 [[시중]](侍中) 겸 영릉[[태수]]를 받고 돌아와 조조를 칭송하며 유표의 아들을 [[인질]]로 보내자고 해서 죽이려 했지만 [[부인]] 채씨 등의 만류로 그저 가두는 것으로 그쳤다.
[[208년]] 8월 병으로 죽으니, 향년 67세였다. 남양태수(南陽太守) 민사(旻思) 등이 향리의 유지들과 함께 자금을 모아 시신을 운구하였다. 아들은 오관중랑장(五官中郞將)에 임명되었고, 조정의 허락을 받아 고향에서 장사지냈다.<ref name=a/>
 
=== 지역 할거 ===
유표는 본래 큰아들 [[유기 (후한)|유기]]를 아꼈으나, 막내아들 [[유종 (후한)|유종]]이 후처 채씨의 인척이 되면서 채씨의 공작에 따라 점차 유기를 싫어하게 되었다. 또 [[채모]]와 [[장윤 (후한)|장윤]]이 유종의 후원이 되었다. 결국 유표는 유기를 황조의 후임 강하태수로 내치고 유종을 정식 후계자로 삼았다.<ref name="h74b-l"/> 이에 따라 유종이 유표가 죽은 후 그 자리를 계승하였으나, 유기도 유비에 의해 형주의 주인으로서 일어났다.
[[201년]] 서악(西鄂)을 점령하는 등 조조를 배후에서 견제하였다.<ref>《[[구주춘추]]》 ; 배송지 주석, 《삼국지》23권 위서 제23 [[두습]]에서 인용</ref> [[여남]]에서 조조에 항전하던 [[유비]]가 의탁해왔기에 후하게 대하고 [[신야]](新野)를 내주었으나<ref name='패왕'>《삼국지》32권 촉서 제2 선주 유비</ref> 중용하지는 않았다. [[202년]] 조조가 여양(黎陽, 지금의 [[허난성]] [[쉰 현]])에서 [[원담]]·[[원상 (후한)|원상]] [[형제]]와 일진일퇴를 거듭할 동안<ref>《자치통감》64권 한기 제56 헌제 건안 7년</ref> 유비가 [[섭현]](葉縣)까지 치고 올라간 후 [[하후돈]]과 [[우금 (문칙)|우금]]을 박망(博望)으로 유인하여<ref name='패왕' /> 큰 [[박망 전투|피해를 주]]었다.<ref>《삼국지》18권 위서 제18 [[이전 (후한)|이전]]</ref> [[203년]] 조조가 형주로 남하하다가 원상에게 깨진 원담의 구원 요청을 받고는 돌아갔다.<ref name='토익' /> 원담과 원상에게 [[편지]]를 보내 일단 형제끼리의 혈전을 멈추고 조조부터 잡을 것을 종용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ref>[[손성]], 《위씨춘추》 ; 배송지 주석, 《삼국지》6권 위서 제6 원소 자담 자상에서 인용</ref>
 
그동안 남방에서는 [[교주]][[자사 (관직)|자사]] [[장진]](張津)과의 [[전쟁]]을 유리하게 전개하였다.<ref>《삼국지》52권 오서 제7 [[설종]]</ref> 결국 장진은 부하인 구경(區景)에게 피살당했고 유표는 [[뇌공]]을 자사에, 오거(吳巨)를 창오태수(蒼梧―)에 앉혔다.<ref>《삼국지》49권 오서 제4 [[사섭]]</ref> [[손권]]은 거듭하여 강하를 찔렀다. 강하태수 [[황조]]가 [[방파제]] 역할을 하였지만 그 피해가 누적되었다.<ref name='황조는 나의 원수'>《삼국지》47권 오서 제2 오주 손권</ref> 조카 [[유반]]과 [[황충]]은 [[장사군]] [[유 현|유현]](攸縣)에서 수비하였다.<ref>《삼국지》36권 촉서 제6 황충</ref>
==인물 및 일화==
유표의 용모는 키가 8척에 달하고, 위엄이 있는 풍모였다고 한다. 유표는 정치를 잘 해 전란이 계속되어 토지에서 도망친 사람들이 안전한 형주에 모여들게 되어 형주는 급속히 발전하게 되었다. 또 형주에 들어온 사람중에는 명사들이 있어, 형주에는 우수한 인재들이 모여들게 되었다. 유표는 학문을 장려하였고, [[송충]]이나 [[사마휘]] 등의 학자도 육성하게 되었다. 유표 자신도 유학자로서 당인(黨人)이었던 [[왕창 (후한)|왕창]](王暢)에게 사사하여, 젊을 적부터 유학자로서 알려져 “팔교”(八交) 혹은 “팔고”(八顧) 및 “팔우”(八友) 중 한 명에 뽑히기도 하였다. 또한 유표는 형주를 중심으로 한 강남 지역 최고의 선비라는 [[강하팔준]](江夏八俊)중에서도 필두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유표는 후계자 문제를 쉽게 결단내리지 못하여 훗날 그 사업이 그대로 조조에게 흡수되었다.
 
[[207년]] 조조가 원상과 [[오환]] 정벌을 위해 북쪽으로 [[백랑산 전투|원정한]] 사이 유비가 [[허도]]를 급습하자고 했으나 움직이지 않았다.<ref name='패왕' /> 208년 손권으로부터 꿋꿋이 강하를 지켜내던 황조가 결국 [[작전 중 사망|전사]]하였다.<ref name='황조는 나의 원수' /> 후계자 경쟁에서 밀려난 장남 [[유기 (후한)|유기]]가 그 후임을 자처하여 부임하였다. 8월([[음력]]) 조조가 하북을 정리한 후 다시 형주로 남하하던 때 병사하였다. [[나이]] 67세였다.<ref>〈유진남비〉 ; 채옹, 《채중랑집》에서 인용</ref> 형주를 거의 20년간 다스렸음에도 집안에 남은 [[재산]]이 없었다. 후사는 [[채모]], [[장윤 (후한)|장윤]] 등 평소 대다수의 지지를 받던 차남 [[유종 (후한)|유종]]이 이었다.
이런 일이 있었다. 유표가 한숭으로 조조를 정탐하게 했는데, 한숭은 황제를 끼고 있는 조조를 만나게 되었다가 황제의 명을 받는 날에는 유표의 명령에 복종할 수 없게 되므로 거부했으나 유표는 기어이 한숭을 조조에게 보냈다. 돌아온 후 과연 한숭은 조조를 추켜올렸고, 유표는 한숭을 죽이려 했다가 주변의 만류로 그만두었다. 또, [[감녕]]을 병졸로 남겨두며 중용하지 않아 결국 감녕이 [[손권]]의 부하가 되어 자신 수하의 [[황조]]를 잃는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 평가 ==
게다가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인하여 사실상 채모의 허수아비로 전락했는데 이런 위인 주제에 권력의 욕심은 대단해서 헌제가 즉위하자 조공을 끊고 황제와 복식을 동일하게 하며 칭제했다.
 
===평가===
진수는 《삼국지》에서 유표를 원소와 묶어 다음과 같이 평했다. “유표와 원소는 모두 위용이 있으며, 넓은 도량과 식견으로 이름이 당세에 알려졌다. 유표는 한남을 점거하고 섰으며, 원소는 하삭에서 웅위를 보였으나, 모두 겉으로는 너그럽고 속으로는 꺼리며, 모략을 좋아하나 결단이 없었으며, 재주가 있어도 쓰지 못하고, 좋은 것을 들어도 받아들일 수 없었으며, 적자를 폐하고 서자를 세우고, 예의를 버리고 편애를 숭상했으니, 그 후사가 고통을 받고, 사직이 기울어져 엎어진 것이 결코 불행이 아니었다.”
 
== 삼국지연의 ==
즉 진수는 원소와 유표를 비슷한 자라고 생각하였다. 조조나 손권의 후계자 다툼에서도 서자를 후계로 세우는 것을 간언할 때 그 나쁜 사례로서 원소와 유표를 여러 번 썼다. 하지만 유종은 유표의 후계자로서 순조롭게 지위를 계승했고, 한편 유기는 유비를 의지하였다. 이 점에서 후계자의 권위가 인정되지 않고 골육상쟁이 벌어졌던 원소 일족과는 다르다. 또한 형제가 조조와 유비에게 순순히 흡수되어 버렸던 것도 끝까지 조조에게 저항을 계속하던 원소 일족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사서가 아닌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몰래 [[옥새]]를 습득한 채 장사로 돌아가는 손견을 [[원소 (후한)|원소]]의 명령을 받아 공격하였으며, 이에 분노한 손견이 장사로 귀환하고 형주에 침입하자, 황조에게 명령하여 이를 방어하고, 원소와 동맹하여 대항했다. 황조는 포로로 잡히기까지 하며 고전했지만, 괴량의 계책으로 추격하던 손견을 살해하여 형주를 지킬 수 있었다. 이 때 괴량이 손씨를 완전히 파멸시키도록 권했지만, 이를 거부하고 손견의 유해와 황조를 교환함으로 마무리지었다.
 
== 삼국지연의에서의 유표 ==
《삼국지연의》에서는 유표가 옥새를 얻어 장사로 돌아가는 손견을 [[원소 (후한)|원소]](袁紹)의 명령을 받아 공격하였으며, 이에 분노한 손견이 장사로 귀환하고 형주에 침입하자, 황조에게 명령하여 이를 방어하고, 원소와 동맹하여 대항했다. 황조는 포로로 잡히기까지 하며 고전했지만, 괴량의 계책으로 추격하던 손견을 살해하여 형주를 지킬 수 있었다. 이 때 괴량이 손씨를 완전히 파멸시키도록 권했지만, 이를 거부하고 손견의 유해와 황조를 교환함으로 마무리지었다.
 
== 가계 ==
[[파일:유표.png]]
* [[아들]] : [[유기 (후한)|유기]], [[유종 (후한)|유종]]
 
== 섬긴 사람들 ==
==유표를 섬겼던 주요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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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녕]] - 정확히는 [[황조]]의 수하. 병졸에 가까운 하급자로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가 손권에게 귀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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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준 (후한)|곽준]] - 유표의 명령으로 죽은 형 곽독이 모은 사병을 통솔했다. 유표 사후 유비에게 귀순했다.
* [[곽준 (후한)|곽준]]
*[[괴량]] - 남(南)군 중로(中盧)현 사람. 괴월 및 채모와 함께 유표에게 초청받았다. 이후 계략으로 손견을 전사시킨다.
* [[괴량]]
*[[괴월]] - 유표를 보좌하던 여양현령(汝陽縣令; 후에 장릉[[태수]](章陵太守). 유표 사후 유종에게 조조에게 귀순할 것을 권한다.
* [[괴월]]
*[[두기 (공량)|두기]] - 유표의 명령으로 천자를 위한 악단(樂團)을 편성했다. 유종의 항복에 따라 조조를 섬겼다.
* [[두기 (공량)|두기]]
*[[등희]] - 치중(治中). 간언을 유표가 듣지 않자, 병을 이유로 사직했다. 조조가 형주를 평정한 후, 초빙하여 시중(侍中)이 되었다.
* 등희(鄧羲)
*[[문빙]] - 형주북쪽을 수비하던 대장. 유종의 항복에 따라 조조를 섬겼으나, 형주를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해 슬퍼하였다.
* [[문빙]]
*[[방계]] - 양양에 할거하던 장호(張虎)와 진생(陳生)을 항복시켰다.
* 방계(龐季)
*[[부손]] - 동조연(東曹掾). 유표 사후, 유종에게 조조에게 귀순할 것을 권하고, 그 공으로 조조에게도 중용받았다.
* [[부손]]
*[[상랑]] - 유표에 의해 임저(臨沮)의 현장(縣長)에 임명되었다. 유표 사후 유비에게 귀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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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충]] - “후정(後定)-오경장구(五経章句)”을 편찬한 학자. 유종이 항복한 것을 유비에게 전했다. 이렇게 되자 장비에게 차여버렸다.
* [[상랑]]
*[[이엄 (촉한)]] - 유표를 섬겨 형주의 여러 현의 장을 역임한다. 조조의 침공으로 서천으로 망명해 유장을 섬기다가 유비의 서천 공략 때 투항한다. [[백제성]]에서 유비의 탁고를 받고 [[제갈량의 북벌]] 때 식량수송을 담당하지만 거짓정보를 흘려 관직이 박탈되고 유배된다.
* [[송충 (후한)|송충]]
*[[이적 (촉한)]] - 유표를 섬기다가 유비와 인연을 맺게 되고 그 후로 계속 유비를 섬긴다.
* [[이엄 (촉한)|이엄]]
*[[왕위]] - 조조를 사로잡아 패권을 노리자고 유종에게 진언했으나 거부당했다.
* [[이적 (촉한)|이적]]
*[[왕준 (후한)|왕준]] - 원소와 동맹을 맺는 것에 대해 유표에게 간언했으나 실패했다.
* [[왕위]]
*[[왕찬]] - “한말영웅기(漢末英雄記)”를 썼다. 용모가 추해서 유표에게 존중받지 못했다. 유표 사후 유종에게 조조에게 귀순할 것을 권한다.
* [[왕찬]]
*[[위연]] - 《삼국지연의》에서는 유표의 부하로 있으면서 유비의 편을 들다가 채모, 문빙 등과 치열하게 싸우고 도망가 장사태수 한현의 부하로 들어갔다. 유비가 장사로 쳐들어오자 한현을 베고 유비에게 항복했다. 사서에서는 유표를 섬겼다는 말은 없으며, 처음부터 유비를 섬겼다.
* 유망지(劉望之)
*[[유망지]] - 종사(從事). [[위 (삼국)|위나라]]의 시중 [[유이 (조위)|유이]]의 형. 명성이 높았으나, 유표에게 직언을 토하다가 처형되었다.
* [[반준]]
*[[유선 (후한)|유선]] - 별가(別駕). 한숭과 함께 유표에게 조조를 따를 것을 진언하였으며, 형주를 점거한 조조에 의해 상서령(尙書令)에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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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 (후한)|장윤]] - 채모의 외척. 채모와 함께 유종을 후계자로 세우는 것에 대해 유표에게 권했으며, 조조에게 투항한 후 주유의 계략으로 죽는다.
* 유선(劉先)
*[[채모]] - 유표의 측근이며 형주의 실세. 유표의 아내가 채모의 누나다. 자신의 조카였던 유종을 후계자로 세우도록 적극적으로 유표에게 권했다.
* [[장윤 (후한)|장윤]]
*[[한단순]] - 박학다식하여 젊을 때부터 명성을 떨쳤다. 유표 사후에는 유종을 섬겼으며, 유종을 따라 조조에게 항복했다. 조조는 한단순을 아들 조식의 밑에 두었다.
* [[채모]]
*[[한숭]] - 종사중랑(從事中郎). 조조에게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온 뒤, 유표에게 의심받아 감금되었다.
* [[한단순]]
*[[황조]] - 강하태수(江夏太守). 손견의 침입을 퇴치한 후, 그의 아들 손권과 전투를 벌이다 패해 전사했다.
* [[한숭]](韓嵩)
*[[황충]] - 유표에 의해 중랑장(中郞將)에 임명되어 장사군(長沙郡) 유현(攸縣)을 지켰다. 유비가 장사를 평정하자, 신하가 되어 한중에서 하후연을 죽였다.
* [[황조]]
* [[황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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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각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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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s/>
 
==출전 참고 문헌 ==
* 《[[후한서]]》74권下 열전 제64下 유표
<!-- 일본어 위키백과의 참고문헌입니다. -->
* 《[[삼국지]]》6권 위서 제6 유표
*[[陳寿]]著、[[裴松之]] 注、「正史 三国志」1巻(魏書I)、[[今鷹真]]・[[井波律子]] 訳、筑摩書房(ちくま学芸文庫)、1992年02月、16、28、頁。ISBN 4-480-08041-4
*[[陳寿]]著、[[裴松之]] 注、「正史 三国志」6巻、[[小南一郎]] 訳、筑摩書房(ちくま学芸文庫)、1993年05月、9頁。ISBN 4-480-08046-5
*[[陳寿]]著、[[裴松之]] 注、「正史 三国志」8巻(呉書III) 、[[小南一郎]] 訳、筑摩書房(ちくま学芸文庫)、1993年07月、224-225頁。ISBN 4-480-08089-9
*[[渡辺精一]]著、「三国志 人物鑑定辞典」、[[学研]]、1998年05月、ISBN 4-05-400868-2
*[[渡邉善浩]]著、「図解雑学 三国志」、[[ナツメ社]]、2001年07月、ISBN 4-8163-2926-9
*[[阿部幸夫]]監修、[[神保龍太]]著、「面白いほどよく分かる 三国志」、[[日本文芸社]]、2001年06月、ISBN 4-537-25044-5
*「三国志群雄 野望のデータファイル」、[[新人物往来社]]、1994年12月、264-265頁、T-10645791505
 
{{삼국지 중요 등장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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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142년 태어남]]
[[분류:208년 죽음]]
[[분류:한나라의후한의 정치인]]
[[분류:한나라의후한의 장군]]
[[분류:유표와 주변 인물| ]]
[[분류:산둥 성 출신]]
[[분류:후한말병사한 군벌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