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섭 (언론인)"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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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섭'''(李晶燮, <small>일본식 이름:</small> 宮本晶燮('''미야모토 아키쇼'''), [[1899년]] ~ ?)은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언론인으로, 호는 경곡(鏡谷)이며, 본적은 [[함경남도]] [[함흥시|함흥군]] 주서면이다.
 
== 생애 ==
[[1919년]] [[보성고등학교 (서울)|보성중학교]]를 졸업한 뒤 프랑스로 유학했다. [[1926년]] 3월 [[프랑스]] [[파리 대학교]] 문과를 졸업했고, 같은 해 7월 17일 조선으로 귀국했다.<ref>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26071800209202008&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26-07-18&officeId=00020&pageNo=2&printNo=2105&publishType=00020 佛國(불국) 學界(학계) ◇ 最近(최근)의 消息(소식)] 1926년 7월 18일 동아일보. </ref> [[1927년]] [[신간회]]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같은 해에 [[중외일보]] 논설위원으로 발탁되었다. 1927년 7월 2일 세계 일주를 떠났으며, 같은 해 7월 21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최린]]과 합류했다.<ref name="신문과 방송"> {{서적 인용
|저자=정진석
|제목=신문과 방송
|장=현대사 속의 언론-중외일보 필화 사건}}</ref>
 
[[1927년]] [[10월 8일]] 《중외일보》에 세계 일주 기행문인 〈세계 일주 기행 - 조선에서 조선으로〉를 연재하기 시작했지만, [[1928년]] [[2월 27일]] 《중외일보》에 실린 [[아일랜드]] 기행문 필화 사건에 연루되어 중외일보 주필 [[이상협 (1893년)|이상협]]과 함께 보안법 및 신문지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었고, 1928년 3월 1일 연재가 중단되고 만다.<ref name="신문과 방송" /> 당시 조선총독부에서는 이정섭이 쓴 아일랜드 기행문이 조선의 독립 운동을 고취시킨 것을 문제삼았다. 1928년 4월 4일 경성지방법원으로부터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지만, 1928년 11월 2일 경성복심법원으로부터 징역 6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ref>[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1745&evntId=0034982108&evntdowngbn=Y&indpnId=0000013751&actionType=det&flag=1 이정섭(李晶燮) : 독립운동관련 판결문 (1928년 11월 1일)] 대한민국 국가기록원</ref>
 
[[1932년]] [[조선일보]] 정치부장으로 임명되었고, [[1933년]] [[11월 6일]] [[시중회]] 간사로 선임되었다. [[1938년]] 2월 [[미나미 지로]] 조선총독과 가진 회견에서 [[일본 제국]]의 [[내선일체]] 방법론 가운데 하나로 이른바 “민중단일당”"민중단일당"(民衆單一黨) 건설을 제안했는데,제안했다. 그가 구상한 “민중단일당”은"민중단일당"은 군(軍)·관(官)·민(民)의 합작으로 설립되어, 이들을 일체로 만들고 조선을 총지배하는 단일 조직이었다. 이 회견은 1938년 5월에 발행된 잡지 《[[삼천리 (일제 강점기의 잡지)|삼천리]]》에 〈총독회견기(總督會見記)〉라는 제목으로 게재되었다. 1938년 5월 2일 [[경성방송국|경성중앙방송국]] 방송부 제2방송과 직원으로 입사했다.
 
[[1939년]] 《재만조선인통신》에 내선일체를 찬양하는 논설을 기고했고, [[1940년]]부터 [[1944년]]까지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삼국 동맹 조약]] 체결과 [[태평양 전쟁]], [[대동아 공영권]]을 찬양하는 논설을 기고했다. [[1941년]] 11월 조선방송협회 제2방송부 보도과장과 기획과장으로 선임되었다. 1941년 9월 7일 [[임전대책협의회]] 채권가두유격대 명치정대에 참가했으며, [[1941년]] [[10월 22일]]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 [[1945년]] [[6월 9일]] [[조선언론보국회]] 평의원으로 각각 선임되었다. [[1945년]] [[6월 14일]] 조선언론보국회 주최로 열린 언론총진격대회 연사로 활동했다. 이러한 경력 때문에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의 언론/출판 부문,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광복 이후인 [[1945년]] [[9월 15일]]부터 [[1948년]] [[10월 7일]] 대한민국 정부의 방송 국영화 조치로 해체될 때까지 조선방송협회([[한국방송공사]]의 전신) 회장을 역임했다. [[한국 전쟁]] 때인 [[1950년]] [[7월 17일]] 납북되었으며 그 뒤의 행적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