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교: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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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교'''(金履喬, [[1764년]]~[[1832년]])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자는 공세(公世), 호는 죽리(竹里)이며 본관은 안동으로 관찰사 김방행(金方行)의 아들이다.
 
[[1789년]] 문과에 급제한 이래 조정의 주요 관직을 두루 거쳤다. [[장헌세자]]를 옹호하는 [[시파]]에 속했기 때문에 신유교난 때 유배되기도 하였다. 1806년 풀려나 다시 중앙과 지방의 요직을 두루 맡았다. 1811년 통신사행의 사신으로는 정사 죽리 김이교(金履喬), 부사에 남진 [[이면구]](南霞 李勉求), 제술관은 [[이현상 (1770년)|이현상]](李顯相), 정사 서기는 청산 [[김선신]](淸山 金善臣), 종사 서기는 백옹 이명오(泊翁 李明五)가 참여하였다.<ref>동방한문학 제36집 (동방한문학회, 2008) 129페이지</ref> 이후 1811~1812년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쇼군]] 취임을 축하하는 [[조선 통신사|통신사]]로 [[쓰시마 섬]]에 다녀왔다. 이후 다시 조정의 요직을 두루 맡은 끝에 1831년 우의정이 되었다. 사후 순조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정이다.
 
== 가족 관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