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위 전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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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고구려는 [[부여]]나 [[한사군]](漢四郡)과 투쟁하면서 성장하였고 비옥한 영토를 차지하고자 정복 활동을 적극으로 벌이는 과정에서 기원전 128년 예(濊)의 족장 남려가 한(漢)과 함께 [[창해군]](滄海郡)을 만들어 고구려를 압박했지만, 기원전 126년 끝내 축출했으며, 기원전 75년 한의 속현인 [[현도군]]을 압록강 유역에서 축출하는 등 부족 연맹체를 굳히고 1세기 초에 이미 왕호를 제정한 이후 고대국가로서 본격으로 건국하게 된 고구려는 발판을 탄탄히 하고 [[북옥저]]와 졸본과 국내성 주변 지역을 흡수했다.
 
고구려가 이렇게 성장하자 위협하는 제국이 늘었다. [[농안]]을 거점으로 성장한 부여는 [[기원전 6년]]과 [[13년]]에 침공하고 복속을 요구했으나 오히려 세력을 키운 고구려가 [[22년]], 부여 정벌을 감행하여 부여왕을동부여 [[대소|대소왕]] 죽이고 귀환한 이후 부여는 고구려를 섣불리 침공하지 않았다. 부여를 격퇴한 고구려는 영토를 더욱 확장하자 [[28년]] 한이 침공했지만 고구려는 국내성에서 농성하면서 방어했고[[32년]] 낙랑군도 정복하는 등 만주와 북부 한반도에서 위세를 떨쳤다.
 
[[53년]]에 즉위한 [[고구려 태조대왕|태조대왕]](太祖大王) 때에 이르러 고구려의 5부족은 중앙 행정 단위인 5부로 통합됐다. 옥저(沃沮)를 복속시키는 등 고대국가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고 그는 주위의 여러 부족을 정복해 동으로 [[옥저]]와 [[동예]](東濊)를 공격하고 남으로는 살수(薩水)<ref name="청천강">청천강(淸川江)으로 추정</ref>에 미치고 북으로는 [[부여]](夫餘)를 압박하고 서로는 한의 요동군과 현도군과 대립해 1세기에서 2세기에 걸쳐 고구려는 고대 정복국가로서 위세를 떨친 일변, 후한(後漢) 말기에 중원이 3국으로 분열되어 혼란했던 시기였고 요동 일대는 공손씨(公孫氏)의 독립 세력권에 있었다. 고구려는 서진하려면 서의 요동의 공손씨와의 필연으로 충돌할 수 밖에 없었고 요동의 공손씨 세력에게는 중원의 [[위 (삼국)|위]](魏) 외에도 동의 고구려는 위협스러운 세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