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부루왕: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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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해모수]]의 아들로 [[부여]]의 왕위를 계승한 해부루는 재상 아란불(阿蘭弗)이 천제(天帝)의 계시를 받아 도읍을 옮길 것을 청하자, 그에 따라 동쪽 바닷가의 가섭원(迦葉原)이라는 곳으로 나라를 옮겼다.옮겨 이를 동부여라고 하며,하였다.<ref>[[#김부식 해부루가(1145)|김부식 옮겨간(1145)]] 뒤의“後其相阿蘭弗曰 日者天降我曰 將使吾子孫立國於此 汝其避之 東海之濱有地 號曰迦葉原 土壤膏腴宜五穀 可都也 阿蘭弗遂勸王 移都於彼 國號東扶餘” 원래(후에 도읍지에는그 재상 아란불이 말하기를 “어느 날 하느님이 나에게 내려와 말하기를 장차 나의 자손이 이곳에 나라를 세울 것이니 너는 이곳을 피하거라. 동쪽 바닷가에 가섭원이라고 하는 곳이 있는데, 동명제(東明帝그곳은) 나라를토양이 세웠다는비옥하고 기록오곡을 기를 만하니 도읍으로 삼기 적당하다”라고 했다. 아란불이 왕께 권하자 도읍을 이곳으로 이동하고 국호를 동부여라 하였다.) </ref><ref>[[#일연 (1281)|일연 (1281)]] 북부여조, “북부여의“北扶餘王解夫婁之相阿蘭弗。夢天帝降而謂曰。將使吾子孫立國於此。汝其避之{{할주|謂東明將興之兆也}}[...] 移都於彼。國號東扶餘。” (북부여의 왕 해부루의 재상 아란불의 꿈에, 천제가 내려와서 말했다. “장차 내 자손으로 하여금 이곳에 나라를 세우게 할 터이니 너는 다른 곳으로 피해 가도록 하라”.({{할주|이것은 동명왕이 장차 이곳에서 흥할 징조였다.)}} ……이곳으로[...] 이곳으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동부여라 했다.”</ref><ref>[[#김부식 (1145)|김부식해부루가 옮겨간 뒤에 원래 도읍지에는 동명제(1145東明帝)가 나라를 세웠다는 기록 이 있으며, 다른 전승에 따르면, [[해부루]] “부여왕아버지에 해부루가대한 늙도록기록은 아들이없고, 없었다옮겨간 뒤에 [[해모수]]가 하늘에서 내려와 왕이 되었다고 한다. ………후에이처럼, 삼국사기와 재상삼국유사에 아란불이따르면 말하기를부여는 “어느[[해부루]]대에 동해의 하느님이바닷가에 나에게있는 내려와‘가섭원(迦葉原)’으로 말하기를천도를 장차하고, 나의국호를 자손이[[동부여]]라 이곳에하였음을 나라를 세울 것이니있다. 너는이에 이곳을대하여, 피하거라현재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단순한 설화로만 보거나 두만강 하류에 위치했던 하나의 독립된 세력으로 보고 있는 것이 일반적인 통설이다.<ref 동쪽name="hbr1">李强, 바닷가에〈沃沮·北沃沮考略〉 가섭원이라고(《北方文物》 하는1981-1, 곳이1981) 있는데; 匡瑜, 〈全國至兩漢的北沃沮文化〉(그곳은《黑龍江文物叢刊》 1982-2, 1982) 토양이; 비옥하고노태돈, 오곡을〈5세기 기를금석문에 만하니보이는 도읍으로고구려인의 삼기천하관〉(《한국사론》 적당하다”라고19호, 했다.1988) 아란불이; 왕께공석구, 권하자《고구려 도읍을영역확장사 이곳으로연구》, 이동하고(서울: 국호를서경문화사, 동부여라1999) 하였다.”; 池內宏, 〈夫餘考〉 (《滿鮮史硏究》 上世 제1책, 1932) ; 노태돈, 《고구려사연구》, (파주: 사계절출판사, 1999).</ref> 하지만 있으며,일반적으로 다른도읍을 전승에옮기는 따르면,것은 [[해부루]]의자국의 아버지에영역 대한내에서만 기록은가능한 없고일이라는 점을 들어, 옮겨간해부루왕이 뒤에영역 [[해모수]]가 하늘에서동쪽의 내려와가섭원으로 왕이도읍을 되었다고옮긴 한다것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ref name="hbr1" /><ref>나하나,〈부여의 변천과 동부여 문제〉강원대학교 《인문과학연구》 제23집, 2009.12. 311쪽.</ref>
 
[[해부루]]는 아들이 없었는데, 하늘에 제사를 올려 아들을 낳기를 기원하였다. 어느날 곤연(鯤淵) 부근에서 큰 바위를 보고 말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 바위를 치웠더니 금빛이 나는 개구리 모양의 어린아이가 있었다. 이 아이를 아들로 삼고 형상을 따서 [[금와왕|금와]](金蛙)라고 이름지었다.<ref>《삼국사기》에는 ‘금와 얻음 → 동부여 천도’의 순서인 반면, 《삼국유사》에는 ‘동부여 천도 → 금와 얻음’의 순서이다. </ref><ref>[[#김부식 (1145)|김부식 (1145)]] “부여왕“扶餘王解夫婁老無子 祭山川求嗣 其所御馬至鯤淵 見大石 相對流涙 王怪之 使人轉其石 有小兒 金色蛙形 {{*|蛙 一作蝸}} 王喜曰 此乃天賚我令胤乎 乃收而養之 名曰金蛙” (부여왕 해부루가 늙도록 아들이 없었으므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 아들 낳기를 기원하였다. 그가 탄 말이 곤연(鯤淵)에 이르렀는데, 그 곳에 있던 큰 바위를 보고 말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 왕이 이를 기이하게 여겼다. 왕이 바위를 굴려보게 하였더니, 금빛이 나는 개구리({{할주|개구리는 또는 달팽이라고도 한다.)}} 모양의 어린아이가 있었다. 왕이 기뻐하여 “이는 하늘이 내게 준 아이로다.”라라고 말하며 아들로 삼으니, 이가 곧 금와(금빛이 나는 개구리)이다.) </ref><ref>[[#일연 (1281)|일연 (1281)]] 북부여조, “夫婁老無子。一日祭山川求嗣。所乘馬至鯤淵。見大石相對俠流。王怪之。使人轉其石。有小兒金色蛙形。王喜曰。此乃天賚我令胤乎。乃收而養之。名曰金蛙。(부루는 늙도록 아들이 없었다. 하루는 산천에 제사를 지내어 후사를 구하였다. 〔부루가〕 탄 말이 곤연에 이르러, 큰 돌을 마주하고 의기롭게 우는 것을 보았다. 왕이 이를 기이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그 돌을 굴리게 하니, 어린 아이가 있었는데, 금빛 개구리 모양이었다. 왕이 기뻐하여 말하기를, “이것은 하늘은 나에게 내려준 자식이로구나!” 하였다. 이에 맡아서 그를 키웠다. 이름하여 금와라 부르고...)</ref>
이처럼 부여는 동해의 바닷가에 있는 ‘가섭원(迦葉原)’으로 [[해부루]]대에 천도를 하고, 국호를 [[동부여]]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동부여]]에 대해 현재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단순한 설화로만 보거나 두만강 하류에 위치했던 하나의 독립된 세력으로 보고 있는 것이 일반적인 통설이다.<ref name="hbr1">李强, 〈沃沮·北沃沮考略〉 (《北方文物》 1981-1, 1981) ; 匡瑜, 〈全國至兩漢的北沃沮文化〉(《黑龍江文物叢刊》 1982-2, 1982) ; 노태돈, 〈5세기 금석문에 보이는 고구려인의 천하관〉(《한국사론》 19호, 1988) ; 공석구, 《고구려 영역확장사 연구》, (서울: 서경문화사, 1999) ; 池內宏, 〈夫餘考〉 (《滿鮮史硏究》 上世 제1책, 1932) ; 노태돈, 《고구려사연구》, (파주: 사계절출판사, 1999).</ref> 하지만 일반적으로 도읍을 옮기는 것은 자국의 영역 내에서만 가능한 일이라는 점을 들어, 해부루왕이 영역 내 동쪽의 가섭원으로 도읍을 옮긴 것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ref name="hbr1" /><ref>나하나,〈부여의 변천과 동부여 문제〉강원대학교 《인문과학연구》 제23집, 2009.12. 311쪽.</ref>
 
[[해부루]]는 아들이 없었는데, 하늘에 제사를 올려 아들을 낳기를 기원하였다. 어느날 곤연(鯤淵) 부근에서 큰 바위를 보고 말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 바위를 치웠더니 금빛이 나는 개구리 모양의 어린아이가 있었다. 이 아이를 아들로 삼고 형상을 따서 [[금와왕|금와]](金蛙)라고 이름지었다.<ref>[[#김부식 (1145)|김부식 (1145)]] “부여왕 해부루가 늙도록 아들이 없었으므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 아들 낳기를 기원하였다. 그가 탄 말이 곤연(鯤淵)에 이르렀는데, 그 곳에 있던 큰 바위를 보고 말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 왕이 이를 기이하게 여겼다. 왕이 바위를 굴려보게 하였더니, 금빛이 나는 개구리(개구리는 또는 달팽이라고도 한다.) 모양의 어린아이가 있었다. 왕이 기뻐하여 “이는 하늘이 내게 준 아이로다.”라라고 말하며 아들로 삼으니, 이가 곧 금와(금빛이 나는 개구리)이다.” </ref>
 
[[해부루]]의 이름인 부루(夫婁)는 [[단군왕검]]의 아들로 알려져 있는 부루와 이름이 같아 《[[삼국유사]]》나 《세종실록》〈지리지〉에 [[해부루]]와 부루를 동일 인물로 파악한 기록이 전하기도 한다. 그러나 [[단군|단군왕검]]의 아들 부루와 [[해부루]]의 관계를 정확히 밝혀진 것이 없어 구분하여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