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9주):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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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 이전 ===
유사이래 옛 청주지역은 가야의 영역이었다. 고령의 [[반파국]]이 함안의 [[안라국]]과 더불어 금관가야를 대신해 [[대가야]]국을 세워 일시 번영한 뒤 6세기 초반에 백제가 가야의 호남영토와 함께 대사(帶沙)<ref>하동</ref>을 점령하면서 향후 50년간 이지역은 백제와 신라의 각축장이 되었고 동시에 가야는 고령의 반파국 중심의 북가야와 [[안라국]]중심의 남가야로 분열되었다.
[[559년]] 남가야는 신라에 투항해 신라는 안라국의 땅에 [[아시촌 소경]]을 설치했고 3년 후인 [[562]]년에 북가야마저 무력으로 패망시키면서 가야지역 전역을 신라의 영토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 대야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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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에서 앞의 子자를 훈차(訓借)해서 코타コタ라고 읽거니와 이것을 백제에서는 그대로 음차해서 居陀또는 居陁라고 기록한 것이다.</ref> [[문무왕]] 때 백제를 멸망시킨 뒤 거타군을 중심으로 거타주(居陀州)를 설치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685년]][[신문왕]] 5년에 거타주를 개명해 청주를 설치하였다. [[757년]]([[경덕왕]] 16년)에 전국의 행정구역 명칭을 개혁하면서 청주도 강주로 개칭되었다. [[혜공왕]] 때 행정구역 명칭을 원래 명칭으로 되돌렸다고 한다. [[고려]] 때는 진주(晉州)로 개칭하여 지금에 이른다.
 
청주의 신라군은 함안에 검은 옷깃의 소삼정(召參停)과 적황•적록의 만보당이 주류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경덕왕이 개혁한 명칭을 기준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청주 이전의 이름인 거타주(居陁州)를 다수의 기록들이 종종 옛 거창의 이름인 거열(居列)로 적고 있다. 이는 이름이 비슷한 거타와 거열을 혼동한 결과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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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이후 강주장군(康州將軍)을 칭한 윤웅이 고려에 아들을 보내 귀부하여 청주지역이 고려의 군사적인 세력권 하에 들었다. 한편 대야성 일대는 경상도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려던 [[후백제]]와 이를 저지하려는 신라군과의 주요 전장이 되었다. 920년에 대야성이 결국 후백제에 점령되었지만 이를 다시 고려가 막아서 후삼국 시대에 청주지역은 신라, 후백제, 고려 삼국의 각축장이 되어버렸다.
후삼국의 통일 후 전국에 12목이 설치되기까지 청주일대는 지방 호족에 의한 지방자치가 계속되었다. [[893년]] [[고려 성종]] 2년에 12목 중에 진주목(晉州牧)이 설치되면서 다시금 중앙정부의 행정력이 미치기 시작했다. [[995년]] 성종 14년에는 전국에 10도를 설치하면서 산남도(山南道)가 설치되었다. 옛 청주가 경상도가 된 것은 [[1106년]] [[5도양계]]로 이행하면서 산남도와 인근 2도를 합쳐 경상진주도(慶尙晋州道)가 되면서부터인데 이후에도
경남의 진합주도<ref>진주와 합주(합천)</ref>와 경북의 경상주도<ref>경주와 상주</ref>로 나뉘었다가 다시 합치고 그 후 이름도 간간히 바뀌는 등 변천이 많았다. 경상도라는 이름이 확립 된 것은 고려말에 들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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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7년 경덕왕이 지명을 고쳤을 당시 청주에는 11개 군, 27개 현이 소속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삼국사기》 〈지리지〉에 전해지는 강주 조에는 11개 군 30개 현이 나타나고 있다.
 
{| class="wikitable"
|+
'''청주의 소속 군현'''
|-
!군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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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상남도]]
 
== 주석각주 ==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