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대의혹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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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의혹사건'''(四大疑惑事件)은 [[5ㆍ16군사정변]] 이후, [[대한민국 중앙정보부]]가 군사 정변 세력의 정치 자금을 조달하기 위하여 일으킨 4가지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군사정변 이전의 "구악"(舊惡)에 대비되는 "신악"(新惡)이라는 신조어가 나왔으며, [[1963년]]에는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사퇴하게 되었다.
 
== 증권파동 사건 ==
[[1962년]]부터 [[1963년]]까지 [[대한증권거래소]]를 중앙정보부가 직접 장악하여 부당이득을 챙긴 사건으로, 중앙정보부 행정차장 [[이영근 (1924년)|이영근]](李永根), 중앙정보부 관리실장 [[정지원]](鄭智元) 등은 [[농협중앙회]]에 압력을 넣어 당시 농협이 보유하고 있던 인기주인 한국전력주 12만 8천주를 시가보다 5% 싼 가격으로 방출시켰으며, 이것으로 얻은 8억 6224만 6400환을 증권업 유경험자인 윤응상(尹應相)에게 자본금으로 통일증권, 일흥증권, 동명증권을 설립하게 했다. 이와 함께 대한증권거래소 총주의 약 7할을 점유캐 하고, 윤응상의 심복인 서재식을 증권거래소 이사장으로 내세웠다.
이것으로 윤응상의 독무대가 된 대한증권거래소는 증권거래법 및 거래소의 사업규정을 무시해가면서 윤응상계의 증권회사를 불법으로 지원하여 윤응상계의 증권회사의 주가를 폭등시켰다. 그러나 이들 회사는 약속한 결제를 이행하지 않는 방법으로 주가를 폭락시켜 5340명에 달하는 선의의 군소투자가들이 138억 6000만환이라는 엄청난 손해를 입고 자살소동을 빚는 등 큰 사회적 물의가 빚어졌다. 이 사건으로 이영근, 윤응상, 서재식, 등은 "특정범죄처벌에 관한 임시특례법" 위반 혐의로 1963년 3월 11일 육군보통군법회의에 송치되었으며, 같은 해 6월 19일에 열린 육군보통군법회의에서 중앙정보부 행정차장 이영근은 징역 1년, 증권업 유경험자 윤응상은 징역 7년, 대한증권거래소 이사장 서재식은 징역 5년이 구형되었다. '''qnjc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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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나라자동차 사건 ==
 
박정희 정권은 1962년 5월 31일, <자동차 공업 보호법>을 제정하고 공포하였다.
 
이 법은 외국산 자동차(완제품)의 수입을 제한하고 있으면서도 자동차의 제조 및 조립에 필요한 부품에 관해서는 관세를 면할 수 있도록 하고 있었다.
 
이에 '공업 발전을 위해 자동차 공업을 육성해야 한다'는 박정희 정부와 '기름 한 방울 안 나는 나라에서 자동차 공업이란 빈부격차와 정치자금의 수입원만 될 것'이라는 야당의 논쟁이 붙기도 했다.
 
야당의 예측은 정확히 들어맞아 정부와 기업 간에 밀실거래가 발생하고야 말았다.
 
당시 공화당을 창당한 군사 정권은 정치자금이 필요했고, 1961년 12월,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한일 회담차 일본에 갔을때 재일교포 기업 <야스다 상사>의 사장 '박노정'을 만나 정치자금 지원을 요청하게 된다.
 
박정희 정권은 그에 대한 대가로 <야스다 상사>의 한국내 자동차 판매에 대한 특혜를 제공하기로 한다.
 
이로써 1962년 1월 '시발'(대한민국 최초의 자동차 회사)에 지원하기로 예정되었던 기술 지원비는 무산되었고, 재일교포 박노정에게 <새나라자동차> 회사 설립을 허가해주게 되는 것이다.
 
 
곧 <야스다 상사>는 중앙정보부 차장보 '석정선'의 지원으로 국내에 <새나라자동차> 회사를 설립했고, 석정선의 압력을 받은 인천 시장은 새나라 회사의 부지와 자재구입에 까지 편의를 제공했는데, 지원 금액은 약 100만 달러로, 오늘날 가치로 환산하면 1조 그 이상이다.
 
1962년 1월 29일, 일본 기업 <닛산>과 기술제휴(말이 기술 제휴이지 사실상 <닛산>의 제품을 그대로 들여오는것에 지나지 않았음), 현재는 GM대우 자동차 공장이 위치한 부평에 연간 6천대의 생산능력을 가진 조립공장을 세우고, 그 해 11월 부터 생산에 돌입한다.
 
<새나라자동차> 회사는 곧바로 <닛산>의 제품인 파랑새(블루버드) 400여대를 '반제품식'으로 '면세 혜택을 받고' 들여와서 조립하였다.
 
일본의 '파랑새'가 한국에 와서 '새나라'로 이름이 바뀌어 나오게 된 것이다.
 
일본에서는 이미 폐품으로 창고에 가득 쌓아놓은 이 차를 63년도 7월까지 1772대나 들여와 조립생산하였다.
 
말이 조립생산이지 사실 나사나 끼워맞추는 정도의 작업만을 했다.
 
그렇게 생산된 새나라 자동차는 시가의 2배로 한국에서 판매되었다.
 
국내 자동차 회사에 투자하기로 되어 있던 돈을 외국 기업 유치에 투자하는 것도 모자라 외국산 폐품을 2배나 올려 파는 어처구니 없는 짓을 저지른 것이다.
 
 
63년 7월까지 수입된 새나라 자동차는 총 1772대, 약 184만달러 어치를 면세 도입했다.
 
대당 수입단가는 1040달러로 당시 환율로 계산하면 13만 1천원 정도인셈인데 국내판매가는 22만 4천원으로 모든 비용을 빼도 대당 8만 5천원이 남아 총 1억 5천여 만원의 폭리를 취했다.
오늘날 가치로 환산하면 무려 1조원에 가까운 폭리를 취한 것이다.
 
그렇게 취한 폭리 중 일부는 공화당의 정치 자금으로 들어가고 일부는 박노정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윌리엄 마지스트레티' 전 주한미국대사관 부대사는 1963년 6월 19일, 김재춘(3대 중앙정보부장)과의 면담에서 김재춘으로 부터 김종필 전 중앙정보부장이 새나라자동차수입 등을 통해 해외에 부정 자금을 축적했음을 폭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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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춘은 일본차 가격은 한대당 9백달러지만 실제로 일본측에 한대당 천8백달러를 지급한뒤 김종필과 추종자들이 차 한대당 약 천달러의 차액을 돌려받아 일본의 김종필계좌에 예치했다고 말했다.
 
또 한국에 투자하려는 재일교포들로 부터 전체 투자금의 4분의 1만 한국에 들여가고 나머지 4분의 3은 한국정부의 지원을 받게 해주는 대신 한국정부 지원금에 해당하는 4분의 3을 김종필이 사용할 수 있도록 일본은행에 예치하는 방법으로 해외에 부정한 돈을 축적했다고 했다.
 
새나라 자동차는 수입 과정 뿐만 아니라 국내에 들어오고 나서 문제가 더 커졌다.
 
새나라 자동차는 수입 과정 뿐만 아니라 국내에 들어오고 나서 문제가 더 커졌다.
당초 수입 목적은 정부의 '관광용 자동차'라는 목적으로 150여대는 외국인 관광용, 250여대는 일반 관광용으로 허가해서 들여왔으나, 1962년 5월, '서울 아시아 영화제'의 택시 공급을 빌미로, 전량 일반 택시로 둔갑해 버렸다.
 
당초 수입 목적은 정부의 '관광용 자동차'라는 목적으로 150여대는 외국인 관광용, 250여대는 일반 관광용으로 허가해서 들여왔으나, 1962년 5월, '서울 아시아 영화제'의 택시 공급을 빌미로, 전량 일반 택시로 둔갑해 버렸다.
 
당시 한국 자동차 시장을 지배하고 있던 회사는 국산 <시발> 택시였고, 시발 택시의 인기는 매우 높았다.
 
그러던 시발 택시가 보다 현대적 모델을 갖춘 새나라 자동차 택시의 출현으로 하루 아침에 시세가 폭락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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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러니한 사실은 국내 자동차 공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해외의 자동차 도입을 억제하려고 했던 <자동차 공업 보호법>의 원래 목적과는 달리 국내 기술로 만든 시발 자동차의 퇴출을 몰고 왔다는 것이다.
 
이후 남한의 외화사정이 악화되면서 기술과 부품을 모두 외국에 의존하고 있던 새나라 자동차는 수입대금을 충당하기 어려워졌고, 결국 무역 적자만 내고 1년 만에 생산을 중단한다.
 
이후 새나라 자동차는 <한일은행>의 관리하에 있다가 <신진자동차>(대우자동차의 전신)가 인수하였다.
 
 
박정희가 타던 방탄 리무진인 캐딜락 프리트우드 68이 미국 CIA가 제공한 차라는 충격적 사실도 공개했다.
 
지난 1976년 하원 정보위원회가 CIA의 수의계약등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CIA가 박정희에게 방탄리무진을 제공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뉴욕타임스가 1976년 1월 27일 이를 보도하자 CIA가 뉴욕타임스 보도당일, 하원 정보위원회가 CIA와의 사전합의를 어기고 이 정보를 유출했다고 항의하는 서한을 보냈다고 밝혔다. '''qnjc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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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전당구기 사건은 중앙정보부가 금지된 도박 기구 파칭코를 500대 수입케 하고 영업 허가를 내주는 대신 돈을 챙긴 사건이다.
 
1961년 12월에 재일교포 김태준 등이 세칭 파칭코라고 불리는 회전당구대 100대 등을 부산항에 탁송하고 통관에 필요한 귀국증명서 1통을 위조해 재일교포 재산의 국내 반입인 것처럼 속여 국내에 들여왔다. (도입된 빠찡코는 모두 2천 527대였다는 주장도 있다)
그래서 한동안 파찡코 열풍이 불었다.
 
자기 정권을 유지하는데 쓸 정치 자금을 벌기 위해 국민들을 도박에 빠지게 만들면서까지 뒷돈을 챙긴 것이다. '''qnjcu'''</small>
 
== 주석각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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