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월: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잔글편집 요약 없음
33번째 줄:
영남 지방은 고옛날부터 이민족인 백월의 활동 지역이었고, [[기원전 221년]], [[진 시황제]]가 [[제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을 통일한 후, 영남 지방의 공략에 착수했다. [[기원전 219년]], 시황제는 도수를 총사령관으로, 진정(현재의 하북성 정정현) 출신 한인인 조타(찌에우 다)를 부장으로 임명하여 50만의 대군을 파견하여 영남 지방을 공격했다.
 
사령관인 도수는 주민을 학살하다가,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현지에서 살해당하자, 진나라는 새롭게 임효를임오를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4년에 이르는 공략을 계속하여, [[기원전 214년]]에 영남 지방을 평정하기에 이르렀다.
 
진나라는 영남 지방을 평정하고 그곳에 남해군, 계림군, 상군의 3군을 설치하였다. 임효는임오는 남해군 위임, 남해군 내에 박라(博羅), 용천(龍川), 번우(番禺), 게양(揭陽) 네 현을 설치하였다. 부장인 조타(찌에우 다)는 용천현령으로 임명하였다.
 
[[기원전 210년]], 시황제가 병으로 죽고, [[진 이세황제]]가 제위를 계승했지만, [[기원전 209년]] 그 폭정에 반발해 [[진승 오광의 난]]이 발생하면서 진나라는 혼란에 빠졌고, 이윽고 [[전한 고조|유방]]과 [[항우]]에 의한 초한의 항쟁이 시작되어, 중국의 전 국토가 혼란 상태에 빠졌다.
41번째 줄:
이러한 상황하에 [[기원전 208년]], 남해군위의 임효가 중병이 들자, 용천현령의 조타(찌에우 다)가 군위의 직무를 대행하게 되었다. 임효가 병으로 사망하자 남해군위로 취임한 조타(찌에우 다)는 남해군 내의 군대에 명령을 내려 중원의 반란군이 진입하는 것을 저지하도록 함과 동시에 진나라가 남해군에 파견했던 관료를 숙청하고, 자신의 심복을 관료로 등용하였다.
 
[[기원전 206년]] 진나라가 멸망한 후, [[기원전 203년]]에는 계림군과 상군을 병합하여, 남월국을 건국하고, 조타(찌에우 다)가 남월 무왕(南越武王)을 자칭을 하였다자칭하였다.
 
=== 툭판 왕조의 병합 ===
47번째 줄:
 
=== 한나라(漢)와의 전쟁 ===
중국에서는 진나라가 멸망하고 [[한나라|한]](漢)이 흥기한다. 남월국과 한나라와의 관계로 말하자면 [[전한 혜제|혜제]](惠帝, 재위: 기원전 195년-기원전 188년)가 집권한 기간 동안 한나라 왕조와 남월국의 우호적 왕래는 지속적으로 발전했다. 혜제가 재위 7년 만에 세상을 뜨자 [[전한 소제 (3대)고제|소제고제]]의 황후인 여후(呂后)가 뒤를 이어 정권을 잡았다. 여후 집권기의 전반 4년간은 한나라와 월나라의 관계가 여전히 그런대로 현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5년째 되던 해(기원전 183년) 봄, 한나라와 월나라 간의 관계에 변화가 생겼다. <ref>{{서적 인용 | 저자 = 웨난 |기타 = 이익희 역 |제목= 오랑캐의 지하궁전2 |꺾쇠표 = 예 |출판사=일빛 |연도=2001 |쪽=213 |id = ISBN 89-85893-84-X |인용문= 남월과 한나라와의 관계로 말하자면 혜제(惠帝)가 집권한 기간 동안 한나라 왕조와 남월국의 우호적 왕래는 지속적으로 발전했다. 혜제가 재위 7년 만에 세상을 뜨자 여후가 뒤를 이어 정권을 잡았다. 여후 집권기의 전반 4년간은 한나라와 월나라의 관계가 여전히 그런대로 현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5년째 되던 해(기원전 183년) 봄, 한나라와 월나라 간의 관계에 변화가 생겼다. }} </ref> 조타(찌에우 다)는 스스로 황제를 칭하며 수시로 한과 전쟁을 벌인다. 조타(찌에우 다)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양쪽이 대등한 전쟁을 벌였으나, 그의 사후 남월국 내부에서는 중국인 집단과 토착 세력간의 분열이 진행되었고, 한나라에서는 [[전한 무제|한 무제]]가 즉위(재위 기원전 141년 ~ 기원전 87년)하여 강성해진다. [[기원전 111년]], 남월국은 한나라에 의해 멸망하고 그 위치에는 9군이 설치된다.
 
== 지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