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성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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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안 조씨]]'''(咸安 趙氏) 시조 '''조정'''(趙鼎)은 [[고려]] 개국공신이다. 그는 원래 [[후당]](後唐) 사람으로 [[신라]] 말기에 동래하였다고 한다. 2000년 인구는 259,196명이다.
 
* '''[[횡성 조씨]]'''(橫城 趙氏) 시조 '''조욱'''(趙昱, 趙翌)은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조첨(趙瞻)의 아들이다. 조욱은 965년(광종 9) 고려에서 처음 실시한 과거에 장원급제하고,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이르렀다. 품행이 깨끗하고 덕이 높았으며 광종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고, 횡성군(橫城君)에 봉해졌다. 2000년 인구는 5,337명이다.
 
* '''[[순창 조씨]]'''(淳昌 趙氏) 시조 '''조자장'''(趙子長)은 고려 때 [[순창]][[호장]](淳昌戶長)을 지냈다. 그의 5세손인 조인평(趙仁平)이 1177년(명종 7)에 망이·망소이 난을 진압하는 데 큰 공을 세워 금오위낭장(金吾衛郎將), 대장군(大將軍)에 올랐다. 2000년 인구는 17,923명이다.
 
* '''[[횡성 조씨]]'''(橫城 趙氏) 시조 '''조욱'''(趙昱, 趙翌)은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조첨(趙瞻)의 아들이다. 조욱은 965년(광종 9) 고려에서 처음 실시한 과거에 장원급제하고,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이르렀다. 품행이 깨끗하고 덕이 높았으며 광종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고, 횡성군(橫城君)에 봉해졌다. 2000년 인구는 5,337명이다.
 
* '''[[배천 조씨]]'''(白川 趙氏) 시조 '''조지린'''(趙之遴)은 본명은 조유고(趙惟固)이고 [[송나라|송]] 태조 [[조광윤]]의 차남 조덕소(趙德昭)의 아들이다. 979년([[고려 경종]] 4년) 난을 피해 [[고려]]로 들어와 [[황해도]] 배천에 정착하였고, [[고려 현종]] 때에 좌복야 참지정사가 되었다고 한다. 2000년 인구는 66,155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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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양 조씨]]'''(平壤 趙氏) 시조 '''조춘'''(趙椿)은 [[고려 예종]] 때 [[고려]]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서 [[남송]]에 가서 [[금나라]]를 토평하였다. 2000년 인구는 41,047명이다.
 
* '''[[옥천 조씨]]'''(玉川 趙氏) 시조 '''조장'''(趙璋)은 고려시대 광록대부(光祿大夫) 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다. 옥천(玉川)은 [[전라북도]] [[순창군]](順昌)의 별칭으로 순창군지(順昌君誌)에 조장과 그의 아들 [[조전]](趙佺)에 관한 내용이 보인다별칭이다. 2000년 인구는 49,847명이다.
 
* '''[[한양 조씨]]'''(漢陽 趙氏) 시조 '''조지수'''(趙之壽)는 [[덕원부]](德源府) 용진현(龍津縣 : 현 [[함경남도]] [[문천시]], [[원산시]] 일대)에 세거해 온 사족(士族)의 후예로 [[고려]] 조에 조순대부 첨의중서사(朝順大夫 僉議中書事)를 지냈다. 그의 독자 [[조휘]](趙暉)의 후손들이 [[쌍성총관부]]의 총관을 계승했다. 고려 왕족이라는 설도 있다.<ref>고려사 조돈(趙暾) 전(傳)에서 ''일문이 모두 봉군되기에 이르었다.(一門以全 位至封君)''라는 내용이 있는데 일문이란 일가친척을 가리키고, 때로는 조상까지도 포함시킬 수 있다. 일문이 모두 봉군되려면 그 집안은 왕족이거나 왕족에 버금가는 귀족 가문일 수 밖에 없다. 또한 태조실록에도 ''나해(那海)는 그 어머니 조씨가 고려의 왕족으로써(那海以其母趙氏 高麗王族)''이라는 내용이 있다.</ref><ref>[http://blog.daum.net/nostalgiatoroots/15965538 쌍성총관부에 대한 연구 성과와 반성], [http://blog.daum.net/nostalgiatoroots/15965692 고려시대 성씨의 유동성]에서도 관련된 내용이 실려 있다.</ref> 후손들이 조선이 개국하자 한양(漢陽)으로 이거하여 한양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왔다. 2000년 인구는 307,746명이다.
 
* '''[[영흥 조씨]]'''(永興 趙氏)는 [[함경남도]] [[영흥군]]에 세거하던 가문으로 조인재(趙麟才)의 증손 '''[[조영무]]'''(趙英茂)는 조선 개국에 공을 세우고 판전중시사(判殿中寺事)에 올라 개국공신 3등에 책록되었으며, 죽은 뒤 태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조영무]]의 아들 '''[[조서 (1370년)|조서]]'''(趙叙)는 1399년(정종 1) 식년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하여 봉상시박사(奉常寺博士)가 되었다. 그 뒤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사간원예의(司諫院禮議)·중군도총제(中軍都摠制)에 이르렀다. 시호는 안정(安靖)이다.<ref name="nm"> [http://www.kostma.net/FamilyTree/PersonIndex.aspx?mode=1&personid=pd053407&person_uci= 한국학자료센서 - 인물관계정보]</ref>
 
* '''[[옥천 조씨]]'''(玉川 趙氏) 시조 '''조장'''(趙璋)은 고려시대 광록대부(光祿大夫) 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다. 옥천(玉川)은 [[전라북도]] [[순창군]](順昌)의 별칭으로 순창군지(順昌君誌)에 조장과 그의 아들 [[조전]](趙佺)에 관한 내용이 보인다. 2000년 인구는 49,847명이다.
 
* '''[[김제 조씨]]'''(金堤 趙氏) 시조 '''조연벽'''(趙連壁)은 [[고려 고종]] 때 상장군(上將軍)을 지냈다. 2000년 인구는 14,509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