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폰 파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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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직자 정보
[[파일:Bundesarchiv Bild 102-13708, Franz von Papen crop.jpg|thumb|300px]]
|이름 = 프란츠 요제프 헤르만 미하엘<br />마리아 폰 파펜 추 쾨닝겐
'''프란츠 폰 파펜'''({{llang|de|Franz von Papen}}, 1879년 10월 29일 ~ 1969년 5월 2일)은 은 독일의 [[귀족]], [[참모]]장교, 정치인이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며 독일 가톨릭 정당인 [[독일 중앙당]]의 당 대표를 지냈다.<ref>에드몽 파리《예수회의 비밀 역사》P 212</ref> 1932년 [[독일의 총리]]를 지냈으며, 1933년 ~ 1934년에는 [[아돌프 히틀러]] 밑에서 부총리를 지냈다. [[바이마르 공화국]] 말기에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측근 조언자로 활동했으며, 히틀러를 조종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망상을 품고 그를 총리에 임명하도록 힌덴부르크를 설득했다. 그러나 정작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뒤 [[장검의 밤]] 사건 때 권력을 잃고 거세당했다.
|원래이름={{lang|de|Franz Joseph Hermann Michael Maria von Papen zu Köningen}}
|그림 = Bundesarchiv_Bild_183-S00017,_Franz_von_Papen_crop.jpg
|그림설명 = 1936년의 폰 파펜
|국가 = {{국기그림|바이마르 공화국}} [[바이마르 공화국|독일국]]
|직책 = [[독일의 수상|수상]]
|임기 = 1932년 6월 1일 ~ 1932년 11월 17일
|전임 = [[하인리히 브뤼닝]]
|후임 = [[쿠르트 폰 슐라이허]]
|국가2 = [[파일:Flag of Prussia (1918–1933).svg|border|22px]] [[프로이센 자유주|프로이센]]
|직책2 = [[프로이센의 총리|국가판무관]]
|임기2 = 1932년 7월 20일 ~ 1932년 12월 3일
|전임2 = [[오토 브라운]]{{작게|(총리)}}
|후임2 = [[쿠르트 폰 슐라이허]]
|국가3 = [[파일:Flag of Prussia (1918–1933).svg|border|22px]] [[프로이센 자유주|프로이센]]
|직책3 = [[프로이센의 총리|총리]]
|임기3 = 1933년 1월 30일 ~ 1933년 4월 10일
|전임3 = [[쿠르트 폰 슐라이허]]{{작게|(판무관)}}
|후임3 = [[헤르만 괴링]]
|국가4 = {{국기그림|나치 독일}} [[나치 독일|대독일국]]
|직책4 = [[독일의 부수상|부수상]]
|임기4 = 1933년 1월 30일 ~ 1934년 8월 7일
|전임4 = [[헤르만 로베르트 디트리히]]
|후임4 = 공석(1934년 ~ 1941년)<br />[[헤르만 괴링]](1941년)
|출생일 = {{출생일|1879|10|29}}
|출생지 = {{국기|독일 제국}} [[라인란트]] [[베를]]
|사망일 = {{사망일과 나이|1969|05|02|1879|10|29}}
|사망지 = {{국기|서독}} [[바덴뷔르템베르크 주]] [[자즈바흐|오베어자즈바흐]]
|거주지 =
|정당 = [[독일 중앙당]](1932년 이전)<br />[[무소속]](1932년 이후)
|소속 집단 =
|배우자 = 마르타 폰 보흐갈하우
|자녀 = 프리드리히<br />안토이네테<br /> 이자벨라<br />마르가레트<br />슈테파니에
|학력 =
|종교 = [[천주교]]
|서명 =
|웹사이트 =
}}
'''프란츠 요제프 헤르만 미하엘 마리아 폰 파펜 추 쾨닝겐'''({{llang|de|Franz Joseph Hermann Michael Maria von Papen zu Köningen}}, 1879년 10월 29일 ~ 1969년 5월 2일)은 독일의 [[귀족]], [[참모]]장교, 정치인이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며 독일 가톨릭 정당인 [[독일 중앙당]]의 당 대표를 지냈다.<ref>에드몽 파리《예수회의 비밀 역사》P 212</ref> 1932년 [[독일의 총리]]를 지냈으며, 1933년 ~ 1934년에는 [[아돌프 히틀러]] 밑에서 부총리를 지냈다. [[바이마르 공화국]] 말기에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측근 조언자로 활동했으며, 히틀러를 조종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망상을 품고 그를 총리에 임명하도록 힌덴부르크를 설득했다. 그러나 정작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뒤 [[장검의 밤]] 사건 때 권력을 잃고 거세당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 끌려나왔으나 유죄를 선고받지는 않았다. 다만 [[서독]]에서 치러진 자체 재판에서는 8년 노역형을 선고받아 1949년까지 복역했다. 1950년대에 정치생활을 재기하려고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바티칸 교황청은 그를 다시 중용했다. 1959년 [[비오 12세]]의 후임으로 [[요한 23세]]가 교황이 되자 파펜을 개인 고문(secret chamberlain)으로 임명했다.<ref>《위책》P12</ref> 파펜은 1969년 5월 2일에 89세를 일기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