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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후 [[1949년]] 대통령령 제 159호에 의해 [[서울특별시]]가 확장됨에 따라 고양군 독도면 전부가 서울시에 편입됨으로써, 이 지역은 [[성동구]]에 속하게 되고 잠실리에서 잠실동으로 불리게 되었다.
 
[[1971년]] 국토 개발 장기 계획의 일환으로 한강개발사업에 의해 이곳 지역은 대대적인 변형을 가져오는데 남쪽으로 굽어돌았던 송파강이[[송파강]]이 메워지고 잠실섬에[[잠실섬]]에 75만평의 새로운 부지가 조성되었다. 잠실 북쪽은 그대로 물속으로 가라앉혀 파내고[[ 신천강의신천강]]의 너비를 넓혀 줌으로써 새로운 한강의 물길이 형성된 것이다. 이렇게 한강 개발 과정에서 한강의 범람으로 일시적으로 생기는 [[신천강]]을 본류로 삼고, [[송파강]](기존 한강)을 메우며, 지대를 높였던 것이다.(단, 기존 한강의 일부는 메우지 않아 [[석촌호수]]로 남아 있다.)
 
이후 잠실동은 신천동과 함께 한강의 남쪽 지역으로 연육(連陸)되었고, 강남지역의 개발과 인구증가에 따라 [[1975년]] 대통령령 제 7816호에 의해 [[성동구]]로부터 [[강남구]]가 분리 신설됨으로써 잠시 [[강남구]]에 속하기도 하였다. 70년대 말부터 아파트와 [[잠실 종합운동장]]이 들어서는 등의 변화를 거쳤으며, 행정구역도 강남구에서 강동구를 거쳐 송파구에 속하게 되었다.
이렇게 한강 개발 과정에서 한강의 범람으로 일시적으로 생기는 [[신천강]]을 본류로 삼고, [[송파강]](기존 한강)을 메우며, 지대를 높였던 것이다.(단, 기존 한강의 일부는 메우지 않아 [[석촌호수]]로 남아 있다.)
 
이후 잠실동은 신천동과 함께 한강의 남쪽 지역으로 연육(連陸)되었고, 강남지역의 개발과 인구증가에 따라 [[1975년]] 대통령령 제 7816호에 의해 [[성동구]]로부터 [[강남구]]가 분리 신설됨으로써 잠시 [[강남구]]에 속하기도 하였다.
 
70년대 말부터 아파트와 [[잠실 종합운동장]]이 들어서는 등의 변화를 거쳤으며, 행정구역도 강남구에서 강동구를 거쳐 송파구에 속하게 되었다.
 
=== 연혁 ===
* 조선후기 [[경기도]] [[양주군]] 고양주면 잠실리
* 1914. 3.1 [[경기도]] [[고양군]] 뚝도면 잠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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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해오는 이야기 ==
한편 이곳에는 세종 때부터 성종 때까지 부근에 뽕나무를 심고 누에를 길렀었다. 그런데 잠실의 누에치는 사람들이 모두 여자였으므로 이곳의 감독관은 궁궐의 환관, 즉 내시를 보내서 누에고치의 생산실적을 점검하게 하였다.
애초에 이 지역은 강북 즉, 행정구역상 양주군 뚝도면(지금의 뚝섬)에 속하였으나 물의 범람으로 섬이 생겨 나게 되었다. 토사가 쌓이면서 제법 섬의 형태를 갖추었고 큰섬으로 변하게 되었다. 원래 한강은 송파에 접어들면서 신천강(새내)과 송파강(남쪽)으로 갈라져 큰 섬인 잠실섬(360만평)과 그 서남쪽의 작은 부리섬(30만평 정도)을 만들었다.
 
애초에 이 지역은 강북 즉, 행정구역상 양주군 뚝도면(지금의 뚝섬)에 속하였으나 물의 범람으로 섬이 생겨 나게 되었다. 토사가 쌓이면서 제법 섬의 형태를 갖추었고 큰 섬으로 변하게 되었다. 원래 한강은 송파에 접어들면서 신천강(새내)과 송파강(남쪽)으로 갈라져 큰 섬인 잠실섬(360만평)과 그 서남쪽의 작은 부리섬(30만평 정도)을 만들었고,잠실 왼쪽에는 무동이라는무동도라는 또다른 작은 섬이 한강 흐름의 변화에 따라 생겼다가 사라지곤 했다. 부렴마을이 있던 부리섬은 비가 오지 않을 때는 잠실과 백사장으로 연결됐다.
 
예전의 한강은 광진교를 지나 남북으로 갈라져 흘렀다. 남쪽의 물길(송파강)은 현재의 석촌호수와 지하철 2호선 신천역 남쪽을 거쳐 잠실종합운동장 자리에서 탄천과 합쳤다. 북쪽 물길(신천강)은 현재 한강과 비슷한데, 너비는 절반 이하로 좁았다. 잠실·부리섬이 육지로 된 건 한강 공유수면 매립 사업 때문이었다.
 
[[1971년]] 남쪽으로 굽어돌던 송파강을 메워 잠실섬을 75만평의 육지로 만들었다. 잠실 북쪽은 물속으로 가라앉혀 신천강의 너비를 넓힘으로써 지금의 지형을 만들었다. 이 사업 뒤 [[1973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주변 터와 합친 340만평에 잠실아파트단지와 잠실종합운동장을 만드는 잠실지구 종합 개발계획 사업이 추진돼 새로운 개발지로 변했다.<ref>{{뉴스 인용|url=http://news.nate.com/view/20050213n05273|제목=뽕밭이 ‘콘크리트숲’ 으로|성=|이름=남종영, 이종근 기자|날짜=2005-02-13|출판사=한겨레(네이트)|확인일자=2010-05-11}}</ref>
 
한편 이곳에는 세종 때부터 성종 때까지 부근에 뽕나무를 심고 누에를 길렀었다. 그런데 잠실의 누에치는 사람들이 모두 여자였으므로 이곳의 감독관은 궁궐의 환관, 즉 내시를 보내서 누에고치의 생산실적을 점검하게 하였다.
 
또한 중국 한나라때 사마천이 쓴「사기」를 일명 잠사(蠶史)라고 하는데 이것 역시 그가 궁형, 즉 남성 성기를 제거당하는 형벌을 받고 잠실에 보내져서 그곳에서 사기를 집필하였기 때문에 부르게 된 것이다.
 
누에는 고조선(古朝鮮)시대에 기자조선(箕子朝鮮)을 세웠다는 [[기자 (고조선)|기자]](箕子)가 중국에서 가져온 벌레로 전해진다. 오래전부터 [[한국인]]과 함께 하면서 길러 왔기 때문에 명칭도 다양하다. 알에서 깨어난 새끼는 묘, 검은 털을 벗지 못한 새끼를 의자(蟻子), 세 번째 잠자는 누에는 삼유(三幼), 27일 된 것을 잠노(蠶老), 늙은 것을 홍잠(紅蠶), 번데기를 용(踊), 성체를 아(蛾), 고치를 견(繭), 똥을 잠사(蠶砂)라 하였다고 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일부 참조)
 
== 교통 시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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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천동 (서울)|신천동]]
* [[송파구]]
* [[잠실섬과 부리도잠실섬]]
* [[탄천]]
* [[뚝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