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백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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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경애왕]]을 죽이고 왕족 [[경순왕|김부]](金傅)를 [[신라 경순왕|경순왕]]으로 추대했다. 또한 왕제(王弟)·재상(宰相)·역대진보(歷代珍寶)·병장(兵仗)·자녀(子女)·백공(百工) 등을 취하여 [[군사]]를 돌이켰다. [[고려]]의 [[고려 태조|왕건]]은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하여 친히 정병을 거느리고 [[팔공산|공산]](公山)에서 [[견훤]]군을 맞아 싸웠으나 [[김락]](金樂)·[[신숭겸]](申崇謙) 등 장군을 잃고 겨우 몸을 피하여 돌아갔다. 이후 후백제와 [[고려]]는 충돌이 잦았다. 그 중 [[934년]]에 [[고려 태조|왕건]]의 운주(運州)<ref>[[홍성군|홍성]]</ref> 친정으로 웅진(熊津)<ref>[[공주시|공주]]</ref> 이북의 30여 성을 잃게 된 후백제는 큰 타격을 받았다.
 
그 이듬해인 [[935년]]([[경순왕]] 9) 후백제의 내부에는 부자 형제(父子兄弟)의 불화로 파탄이 생겼다. 즉 여러 명의 아내로부터 수십 명의 아들을 낳은 [[견훤]]은 넷째 아들이자 서출인 [[금강 (왕자후백제)|금강]](金剛)을 사랑하여 왕위를 전하려 하자, 적출 장자 [[신검]](神劍)이 불쾌히 여겨 그 아우 두 사람과 모의하여 반란을 일으켜 아버지인 견훤을 [[금산사]](金山寺)에 유폐한 후 금강을[[금강 (후백제)|금강]]을 죽이고, 신검이 대왕(大王)이 되었다. 견훤이 절에서 빠져나와 [[고려]]에 투속하게 되니 후백제는 완전히 분열되어 고려로 하여금 통일 사업에 좋은 기회를 주게 되었다.
 
그러던 중에 그해에 [[신라]]의 [[경순왕]]은 [[고려 태조|왕건]]에게 항복하였다. 또 [[견훤]]의 사위이며 후백제의 [[장군]]인 [[박영규 (후백제)|박영규]](朴英規)도 사람을 [[고려 태조|왕건]]에게 보내어 내응(內應)하니 [[고려 태조|왕건]]은 10만 대군으로 선산 부근에서 [[신검]]의 후백제군을 격파하고, 다시 서로 진격하여 황산(黃山)<ref>충청남도 연산</ref> 부근에 진영을 쳤다. 그러자 신검이 다시 항거할 의기를 잃고는 그 아우 양검(良劍)·용검(龍劍)과 문무의 관리를 이끌고 나와 항복했다([[936년]]). 후백제는 결국 44년만에 멸망하였다. 후백제의 항복으로 [[고려 태조|왕건]]은 [[후삼국]]을 [[후삼국의 통일|통일]]하여 [[고려]] 왕조 500년의 기초를 이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