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제1공화국: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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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월 6일, 대한민국 정부는 비공개 회의를 가졌다. 그 내용은 1) 분쟁 발생시 미국이 한국을 도와줄 희망은 별로 없다는 것, 2) 미국은 [[타이완]] 방어를 위해 [[장제스]]를 도와주지 않을 것이라는 것, 3) 영국의 [[중화인민공화국]] 승인(1950년 1월 6일)은 서방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승인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었다. 이 내용이 1월 2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재 소련 대사 테렌티 스티코프를 통해 소련 외무부에 보고되기도 했다.<ref>{{뉴스 인용|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4072200289104006|제목=러시아 ‘한국전쟁 관련 외교문서’<2>|출판사=한겨레신문|날짜=1994-7-22|쪽=4|인용문=<!-- ◇ 스탈린의 개전 동의 △ 1.29 = 슈티코프는 첩보로 수집된 남한 정부의 비공개회의(1.6)에서 나온 주요 내용을 외무성에 보고. 1) 분쟁 발생시 미국이 한국을 도와줄 희망은 별로 없음. 2) 미국은 대만방어를 위해 장제스를 도와주지 않을 것임. 3) 영국의 중국 승인(50.1.6.)은 서방의 북한 승인이나 마찬가지임.-->}}</ref>
 
한편, 제헌 국회의 임기가 끝날 무렵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정계는 물론이고 일반의 물의를 무릅쓰고 제2차 총선거 실시를 지연시키는 한편, 적자예산의 편성을 시도하였으나 당시 이를 반대하는 미국 국무장관 [[딘 애치슨]]의 각서 도달로 말미암아 정부에서는 종래의 주장을 변경하여 [[대한민국 제2대 국회의원 선거|제2대 국회의원 선거]]를 실시하였다.(1950년 5월 30일)<ref>{{뉴스 인용|url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5081900329202001|제목 = 光復十年의 발자취(19) : 六 · 二五事變|날짜 = 1955-8-19|출판사 = 경향신문|쪽=2|인용문 = <!--制憲國會의 任期가 끝날 무렵 政府에서는 政界는 勿論이요 一般의 物議를 무릅쓰고 第二次總選擧實施를 遲延시키는 한편 赤字豫算의 編成을 試圖하였으나 當時 이를 反對하는 美國務長官「애치슨」氏의 覺書到達로 말미암아 政府에서는 從來의 主張을 變更하여 五 · 三十選擧를 實施하였던 것이다. --> }}</ref> 선거의 결과 무소속 의원이 국회 의석의 과반수를 점하여 압도적인 우세를 보이고 몇몇 중간파 의원들이 두각을 나타냈으며, 정부측 여당의 진출은 미미했다. 북조선은 이에 대해, 1949년 6월에 제정되어 선거 직전인 1950년 4월에 시행규칙을 공포한 [[농지개혁법]]이 유상매수(有償買收) · 유상분배(有償分配)를 원칙으로 하고 있으므로 사실상 토지개혁의 의의가 희박하여, 국민이 노골적으로 정부에 반감을 표시한 결과라고 속단하고 이때에 남침을 감행하면 틀림없이 남한 국민의 지지를 얻을 것이라고 판단하였다.<ref>《[[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현대사회의 발달/시련과 민주주의의 발전/6·25전쟁#전쟁발발 직전의 정황|전쟁발발 직전의 정황]]〉 <!--“1950년 6월은 바로 대한민국 제헌국회의 임기가 만료되어 제2대 국회를 구성하기 위한 5·30총선거를 치른 직후였다. 선거의 결과 무소속 의원이 국회 의석의 과반수를 점하여 압도적인 우세를 보이고 몇몇 중간파 의원들이 두각을 나타냈으며, 정부측 여당의 진출이 미미했던 것이다. 이것은 1949년 6월에 제정되어 선거직전인 1950년 4월에 시행규칙을 공포한 남한의 토지개혁법이 유상매수(有償買收)·유상분배(有償分配)를 원칙으로 하고 있으므로 사실상 토지개혁의 의의가 희박하여, 국민이 노골적으로 정부에 반감을 표시한 결과라고 속단하고 이때에 남침을 감행하면 틀림없이 남한 국민의 지지를 얻을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했던 것이다.”--></ref> 1950년 6월 19일의 [[대한민국 제2대 국회]] 개원식에서는 [[존 포스터 덜레스]]가 참석하기도 하였다.<ref>{{뉴스 인용|url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508190032920200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5-08-19&officeId=00032&pageNo=2&printNo=2977&publishType=00020|제목 = 光復十年의 발자취(19) : 六 · 二五事變|날짜 = 1955-8-19|출판사 = 경향신문|인용문 = <!-- 이렇듯 是非曲절 끝에 五 · 三十選擧가 實施되었고 1950년6월19일 열린 개원식에는 현미국무장관 「떨레스」씨가 참석하는 등 아세아의 민주보루로서 洋洋한 앞날이 약속되었던 것이다.--> }}</ref> 이날 국회가 의장단 선출을 시작으로 활동을 시작하자마자 [[한국 전쟁]]이 일어났다.
 
=== 한국 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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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 승인을 구하는 외교 ===
[[파일:Changmyon-Chobysambd.jpg|thumb|300px|right|[[1948년]] 12월 [[파리 (프랑스)|파리]] UN총회에 파견된 [[대한민국]] 정부 대표단. 맨 앞줄 왼쪽이 [[조병옥]], 가운데는 대표단장 [[장면]], 왼쪽은 [[장기영]], 뒷줄은 왼쪽부터 [[정일형]], [[모윤숙]], [[김활란]], 성명 미상, [[김우평]]]]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국가 승인을 얻기 위한 외교전이 펼쳐졌다. 1948년 9월 9일, 중앙청 앞뜰에서, 정부 수립 후 처음으로 해외에 파견되는 [[장면]], [[조병옥]] 두 특사의 장도를 축하하는 애국청년연합회 주최 환송회가 성대히 열렸다. 이 환송회에서 두 특사는 "하느님의 도움을 받아 소기의 목적을 기필코 달성하고 오겠다"고 다짐한 뒤 상오 11시5분쯤 [[노스웨스트 항공]] DC4기로 김포공항을 떠났다.<ref>{{뉴스 인용 |url =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5030300329204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5-03-03&officeId=00032&pageNo=4&printNo=9056&publishType=00020 |제목=秘錄 韓國外交<22> : 政府樹立 직후(4) |출판사= 경향신문 | 날짜 = 1975-3-3 |인용문=48년 9월 9일. 중앙청 앞뜰에서는 건국후 처음으로 해외에 파견되는 張勉, 趙炳玉 두 特使의 장도를 축하하는 愛國靑年聯合會 주최 환송회가 성대히 열렸다. 이 환송회에서 두 特使는 "하느님의 도움을 받아 소기의 목적을 기필코 달성하고 오겠다"고 다짐한 뒤 이날 상오 11시5분쯤 NWA DC4機로 金浦공항을 떠났다.}}</ref> 한국 대표단은 1948년 12월 7일~ 12월 12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3차 [[국제 연합 총회]]에 참석하였다. 이들은 [[대한민국]]의 유엔승인을 위한 홍보사절로서 그 구성원은 [[장면]](단장), [[조병옥]], [[장기영 (1903년)|장기영]], [[김활란]], [[정일형]], [[전규홍]], [[김우평]], [[김준구]]였다.<ref>{{뉴스 인용 |url =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2080800329102004&editNo=3&printCount=1&publishDate=1962-08-08&officeId=00032&pageNo=2&printNo=5160&publishType=00010|제목 = 歷代유엔總會韓國代表團 |출판사= 경향신문 | 날짜 =1962-8-8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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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또한 이승만을 불신의 눈초리로 지켜보고 있었다. 이승만이 언제 어떤 돌출행동을 저지를지 모른다고 경계의 시선을 멈추지 않았다. [[리처드 닉슨|닉슨]] 미국 부통령이 1953년 11월 13일 한국을 방문하여 "한국의 독자적인 행동으로 한국에서 전쟁이 재발할 경우에는 유엔군은 한국을 돕지 않을 것이며, 모든 경제원조가 중단되고, 유엔군은 모든 필요한 조치를 취한다"는 내용의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했다.<ref>{{서적 인용 |저자= 온창일 |제목= 탈냉전시대 한국전쟁의 재조명 |장=한국전쟁과 한미상호방위조약 |연도= 2000년 |출판사= 백산서당 |쪽=400~401}}</ref> [[한국 전쟁]] 휴전 이후, 미국은 한반도의 긴장상태를 깊이 인식하면고, 양국은 [[한미상호방위조약]](1953년 체결, 1954년 11월 17일 발효), [[주한미군지위협정]]에 따라 양국 간의 정치적·군사적 관계는 매우 긴밀해졌다. 또한 전후에도 [[주한미군]]이 주둔하여 안보를 다지고 경제원조를 강화했으며 미국은 전후복구사업 및 경제부흥사업을 적극 도왔다.
 
이 시기의 한국의 안보외교는 [[한미상호방위조약]]과 이를 보완하고 있는 유엔참전 16개국 선언에 그 근거를 두고 있었다.<ref group="주해">여기에 후일, '박·닉슨' 공동성명이 추가된다.</ref> 한미상호방위조약의 목적은 두 가지로 구분될 수 있다. 즉 첫째, 공산주의자들의 침략행위의 재발을 방지한다는 것과 둘째, 미국은 한국의 안보에 대한 관심을 공식조약의 형태로 표명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조약 3조에 명시된 '헌법적 절차에 의한' 출병(出兵)이란 구절은 한·미간의 관계에 상당한 문제점을 야기시키고 있다. 여기에도 유엔참전 16개국의 선언도 점점 그 효력에 있어서 의문을 야기시키는 상태에 놓여 있다. 물론 이 선언은 그 효과면에 있어서 공식조약과 상당한 차이가 있음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다.<ref>《[[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정치/한국의 정치/한국의 외교/한국의 외교#갈등과 자기고립의 시기(1948∼60년)|갈등과 자기고립의 시기(1948∼60년)]]</ref>
 
=== 한일 관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