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망디: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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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망디는 중세 초기에 [[노르만족]]의 본거지였다. 노르만족은 원주민인 [[갈리아인]]과 [[바이킹]] 침입자들이 섞인 것으로, [[롤로]]의 지도 아래 [[파리 시|파리]]를 공격했다가 [[911년]] [[프랑스의 샤를 3세]]로부터 [[생클레르쉬레프트 조약]]으로 현재의 노르망디가 되는 프랑스 북동부를 할양받았다. 롤로의 후예인 [[노르망디 공작]] 기욤(영어 [[정복자 윌리엄]])은 [[1066년]] [[잉글랜드]]를 공격하여 윌리엄 1세가 되었다. 노르망디는 [[1087년]]까지 잉글랜드와 한 나라로 다스려졌으며, [[1346년]]-[[1360년]]과 [[1415년]]-[[1450년]]의 [[백년전쟁]] 때도 영국군 주둔지로 남아 있었다.
 
노르망디는 백년전쟁[[백년 전쟁]] 이후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지방에 속하게 되었으나 종교전쟁 때 알랑송, 루앵, 캉, 쿠탕스, 바유 등의 노르만 도시들이 [[개신교]]에 가담하여 프로방스 전체가 전란에 휘말리게 되었다. [[프랑스 혁명]] 기간중에는기간 동안에 노르망디는 [[파리 (프랑스)|파리]]의 [[자코뱅]]에 대항하여 연방공화국연방 공화국 설립을 주장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1944년]] [[6월 6일]]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장소가 되어 서부전선을 다시 여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