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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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10월]] [[문석봉]]은 [[김해]]로부터 나와 [[충청북도]] [[보은]] 등지에서 많은 이들을 모아놓고 의병을 일으켜 적당들을 토벌하자고 외쳤다. 이에 이곳과 인접한 읍의 유생, 선비들이 두건과 도포를 입고 나아갔지만 얼마 뒤 [[공주부]]에서 보낸 군인들에 의해 모두 잡혔다.<ref name="hwang153">황현, 《매천야록》 (정동호 역, 일문서적, 2011) 153페이지</ref>
 
명성황후의 직위는 일본의 압력으로 인해 죽음 이틀 뒤 폐인으로 강등했으나, 바로 다음 날 그녀의 직위는 고종의 명으로 "빈"(嬪)으로 올라갔다.<ref name="임385"/><ref>[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ection.jsp?mState=2&mTree=0&clsName=&searchType=a&query_ime=%EB%B3%B4%EC%9D%80&keyword=%EB%B3%B4%EC%9D%80 민왕후를 서인으로 강등시키다] 조선왕조실록, 고종 33권, 32년(1895 을미 / 청 광서(光緖) 21년) 8월 22일(경인) 1번째 기사에서.</ref><ref>[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ection.jsp?mState=2&mTree=0&clsName=&searchType=a&query_ime=%EB%B3%B4%EC%9D%80&keyword=%EB%B3%B4%EC%9D%80 민왕후에게 빈의 호칭을 특사하다] 조선왕조실록, 고종 33권, 32년(1895 을미 / 청 광서(光緖) 21년) 8월 23일(신묘) 2번째 기사에서.</ref> 나라의 어머니에게국모에게 저질러진 이런 만행이 국제적으로 알려져 비난을 받게 된 일본은 10월에는 형식적인 조사를 했으며, 명성황후의 지위도 완전히 복원되어 암살 이전과이전 생전 마지막 작호인 왕후로 같아졌다복작됐다.<ref name="임385"/><ref>[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ection.jsp?mState=2&mTree=0&clsName=&searchType=a&query_ime=%EB%B3%B4%EC%9D%80&keyword=%EB%B3%B4%EC%9D%80 민왕후의 위호를 회복시키고 조령을 격소하다] 조선왕조실록, 고종 33권, 32년(1895 을미 / 청 광서(光緖) 21년) 10월 10일(정축) 1번째 기사에서.</ref> [[1896년]] 고종은 [[아관파천|은신했던 러시아 공사로부터]] 1897년 2월에 돌아와 8월에 연호를 광무로 고치고, 10월에는 대한제국정을 발표하고 황제에 올랐다. 이와 함께 명성황후의 사후 지위도 올라가 [[1897년]] [[음력 1월 6일]] 문성황후의문성의 시호를 받고 문성왕후가 됐으며, 능호는 [[홍릉·유릉|홍릉]]으로 고쳤다.<ref name="임385"/><ref>[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ection.jsp?mState=2&mTree=0&clsName=&searchType=a&query_ime=%EB%B3%B4%EC%9D%80&keyword=%EB%B3%B4%EC%9D%80 왕후 대행에게 문성의 시호를, 홍릉의 능호를, 경효의 전호를 주기로 의논하여 정하다] 조선왕조실록, 고종 35권, 34년(1897 정유 / 대한 건양(建陽) 2년) 1월 6일(양력) 1번째 기사에서.</ref> 그러나 뒤에 명성황후의 시호의 문성(文成)이 [[조선 정조|정조]]의 시호와 같다 하여 여러 논의 끝에 [[음력 3월 2일]] 명성황후는 오늘날의 시호인 '''명성황후'''를명성왕후로 받았다개칭됐다.<ref>[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ection.jsp?mState=2&mTree=0&clsName=&searchType=a&query_ime=%EB%B3%B4%EC%9D%80&keyword=%EB%B3%B4%EC%9D%80 왕후 대행에게 명성의 시호를 주다] 조선왕조실록, 고종 35권, 34년(1897 정유 / 대한 건양(建陽) 2년) 3월 2일(양력) 5번째 기사에서.</ref> 같은 해 8월, 고종은 연호를 광무로 고치고, 10월에는 대한제국정을 발표하고 황제에 올랐다. 이와 함께 명성황후의 사후 지위도 올라가 같은 해 10월 고종의 황제 즉위에 따라 명성황후는그녀 역시 황후에 추존되었으며추존되어 명성황후가 되었으며, 장례도 국장으로 또다시 치러져 지금의 [[청량리동]]에 안치되었다가 지금의 위치로 이장됐다.<ref>[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ection.jsp?mState=2&mTree=0&clsName=&searchType=a&query_ime=%EB%B3%B4%EC%9D%80&keyword=%EB%B3%B4%EC%9D%80 고종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민왕후를 민황후로, 왕태자를 황태자로 책봉하고 산호만세 등을 창하다] 조선왕조실록, 고종 36권, 34년(1897 정유 / 대한 광무(光武) 1년) 10월 12일(양력) 1번째 기사에서.</ref>
 
[[1919년]] 고종이 붕어한 뒤, 고종에게 태황제(太皇帝)라는 시호가 올려지자 그 정후인 명성황후에게도 ‘태’(太) 자의 시호가 올려져 ‘명성태황후’(明成太皇后) 불리기도 한다.되었는데<ref>[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ection.jsp?mState=2&mTree=0&clsName=&searchType=a&query_ime=%ED%99%8D%EB%A6%89&keyword=%ED%99%8D%EB%A6%89 고종 황제의 행장] 조선왕조실록, 순종부록 10권, 12년(1919 기미 / 일 대정(大正) 8년) 3월 4일(양력) 4번째 기사에서.</ref> 왕후에게 2자호를 썼던 조선의 오랜 풍습의 영향 아래 흔히 명성황후로 불리어진다.
 
이런 한편, 명성황후의 암살은 [[조선]] 민중들의 분노를 야기하였고, 암살에 관련된 조선인 장교들과 군인들은 피신하거나 은신해 있었다. 이 때에 백범 [[김구]](이 때의 이름은 [[김창수]], 金昌洙)는 의병으로 [[만주]]에 있다가 [[1895년]] 초 귀국하며 [[일본]]인 상인 [[쓰치다 조스케]](土田讓亮)를 일본 낭인으로 오인하며 치하포에서 만나 그를 죽이는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김구]]는 이에 대해 뒷날 그가 [[일본]] 낭인이거나 왕비 암살에 가담한 자라고 주장하였으나, 오늘날 그는 [[일본]]인 상인으로 알려져 있다.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 배경식 교수는 "지금까지 확인 가능한 어떤 자료에도 그 일본인이 육군중위라는 기록은 없다"며 "일본 공사관의 보고서와 조선 관리의 보고서, 독립신문의 사건 보도는 한결같이 그를 '상인(商人)'으로 적고 있다"고 했다. 그뿐 아니라 배 교수는 백범도 그가 육군 중위가 아니라는 걸 알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ref name="baik01">{{뉴스 인용 |제목 = <nowiki>[</nowiki>Why<nowiki>]</nowiki> 金九에게 이런 모습이? |url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9/19/2008091901072.html|출판사 = 조선일보|저자 = 신정선|날짜 = 2008-9-20|확인날짜 = }}</ref> [[1997년]] [[도진순]] [[창원대학교]] 교수는 일본의 자료로부터 그가 계림장업단의 상인이며 민간인이었다고<ref name="kyunghang01">경향신문 1997년 8월 13일자, 19면</ref> 밝혔다.
 
== 암살의 배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