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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대'''(金之岱, [[1190년]] ~ [[1266년]])는 [[고려]] 후기의 문신이다. 초명은 김중룡(金仲龍)이며, 청도(淸道) 김씨(金氏)의 시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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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대'''(金之岱, [[1190년]]~[[1266년]])는 [[고려 고종]]과 [[고려 원종|원종]] 때의 문신이자 시인이다. 시호는 영헌(英憲), 봉호는 오산군(鰲山君)이다. [[청도 김씨]]의 시조이며, [[수원 김씨]]에도 이름이 올라 있다.
 
== 출생생애 ==
[[파일:pic55up3.jpg|thumb|355px|김지대의 묘(경상북도 청도군 청도읍 소재)]]
[[1190년]]([[고려 명종]](明宗) 20년)에 신라 경순왕의 넷째아들인 대안군 [[김은열]]의 7세손이자 시중(侍中) 김여흥(金余興)의 삼남으로 태어났다. 초명은 중룡(仲龍)이었으며 풍채가 훌륭하고 시(詩)와 문장에 뛰어났다고 고려사에 적혀 있다.
 
[[1217년]](고종 4) 강동성(江東城) 전투에 부친 대신 종군했는데, 군사들이 모두 방패에 기수(奇獸)를 그렸으나 김지대만은 이런 시를 써 붙였다.
그는 문무를 겸한 명신으로 고려의 8대시인이자 다도(茶道)로서도 명성이 있었다고 한다.
 
{{인용문2|<poem>國患臣之患 / 나라의 근심은 신하의 근심이요
== 청년기 ==
親憂子所憂 / 어버이의 걱정은 자식의 걱정이라
28세 때인 1217년(고종 4)에 거란이 침입하자 태학생(太學生)으로서 군대에 자원하여 원수(元帥) 조충(趙沖)을 따라 강동의 싸움에 참가하였다. 당시 대부분의 군사가 이 호신용의 의미로 방패에 기이한 동물(예: 용, 호랑이, 기린 등)이나 도깨비를 그리는 것이 예사였으나, 그는 “국가의 어려움은 신하의 어려움이요, 어버이의 근심은 자식의 근심할 바이다. 어버이를 대신하여 나라에 보답한다면 충과 효를 닦을 수 있을 것이다(國患臣之患 親憂子所憂 代親如報國 忠孝可雙修).”(〈충효쌍수〉(忠孝雙修))라는 시를 지어 붙였다.<ref name="emp"> [http://koreandb.empas.com/history/people/detail?sn=8083 엠파스 한국학, 김지대 편] </ref><ref name="nate"> [http://koreandb.nate.com/history/namebon/detail?sn=89 김씨(金氏) - 본관:청도(淸道)] - 네이트 한국학 </ref><ref name="cdk"> 청도김씨 공식 홈페이지, http://chongdokim.or.kr </ref> 마침 거란 토벌군 총사령관 조충이 군사를 점검하다 그의 방패를 보고 놀라 비범한 사람이라 여기고 가까이에 두어 중용하였다. 그는 큰 공을 세우고 이듬해 3월에 개선하였다.
代親如報國 / 어버이 대신해 나라에 보답할 수 있다면
忠孝可雙修 / 충·효를 동시에 함께 닦을 수 있으리</poem>}}
 
원수(元帥) [[조충]](趙冲)이 열병하던 중 이것을 보고 놀라 그 까닭을 물어보고는 내상(內廂)으로 불러들여 중용했다.<ref name=a>『고려사』 「김지대전」</ref>
[[1218년]](고종 5) 5월 김지대는 문과에 응시하여 장원 급제하여 관직의 길로 나아갔다. 전주사록(全州司錄)으로 있으면서 고아와 과부 등 어려운 사람들을 구휼하고 강호(强豪)를 억제함으로써, 호남의 관리와 백성들이 모두 그를 존경하였다. 내직(內職)으로 들어와서는 보문각교감(寶文閣校勘)을 맡았고 당대의 대학자인 최자(崔滋) 등과 교유하였다.
 
[[1219년]](고종 6) 조충이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문과를 주관했는데, 이 때 김지대가 장원으로 급제했다.<ref name=b>『고려사』 「선거지」</ref>
== 몽고침략기 ==
그는 몽고침략기 [[1240년]] 무렵 진주목사를 지내면서 진주의 촉석루(矗石樓)를 창건하였다.
 
전례에 따라 전주사록(全州司錄)에 임명되자, 고아와 과부를 구휼하고 강호(强豪)들을 억눌렀으며, 적발하는 것이 귀신과 같았으므로 향리와 백성들이 그를 경외했다.
[[1243년]] 전라도안찰사로 임명되었다. 그가 부임할 무렵 전라도 진도에서는 집권자 최우(崔瑀)의 아들 만전(萬全)(무신 집권기 최항(崔沆)의 옛이름)이 그의 수하 통지라는 자와 함께 온갖 악행과 횡포를 부려 백성들의 원성이 무척 자자했다. 신임 안찰사 김지대의 부임으로 만전은 자기 악행의 합법화를 위하여 여러 가지 요구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김지대는 가벼운 것만 처리해 주었고 백성에게 해가 가는 일들은 유야무야식으로 넘겨버리는 등 현명하게 대처했다. 이에 만전은 수하 통지를 보내 그의 일들을 재촉하였으나 지대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이에 만전이 직접 김지대의 관소로 찾아가서 부탁하니 이를 승낙하며 수하인 통지를 다시 보내라고 했다. 만전이 또다시 통지를 보내 여러 가지를 요구하자, 김지대는 수하 관병들로 하여금 통지를 결박하여 강물에 던져 버렸다. 후일 만전(최항)이 집권하여 지대가 워낙 청렴하고 근엄하여 감히 해치지를 못하였다.
 
내직으로 들어와 보문각교감(寶文閣校勘) 벼슬을 받았다가 후에 다시 외직인 전라도안찰사(全羅道按察使)가 되었다.
그해 비서소감(秘書少監,종4품,비서성에 소속된 관직으로 비서감 다음의 고위관직)으로 몽고를 방문하는 사신(使臣)의 임무를 수행하였고, [[1247년]](고종 34) 경상도안찰사(慶尙道按察使)를 역임했다.
 
[[1240년]](고종 27) 진도(珍島)에서 [[최우]](崔瑀)의 아들 [[최항 (고려 무신)|만전]](萬全)이 한 사원의 주지로 있었는데, 그의 문도들이 횡포를 자행했다.
그 뒤 [[1255년]](고종 42)에는 판사재사(判司宰事)가 되어 동지공거(同知貢擧)로서 진사를 뽑았고, [[1258년]](고종 45)에는 몽고군이 북쪽 변방을 침입하자 조정에서는 당시 군무를 소홀히 하던 북계지병마사 홍희(洪熙)가 여색만 탐하고 군무를 제대로 돌보지 않자, 김지대를 첨서추밀원사(簽書樞密院事)에 승진시켜 파견하였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군기를 엄히 세우고 민심을 도닥여서 몽고 군대의 침입으로부터 서북 40여 성을 안전하게 지켜낸다.
 
그 중 통지(通知)라는 자가 제일 심했는데, 김지대는 처음에는 그의 청탁을 모두 거부했다가, 직접 만전을 만나 몇 개는 즉석해서 해결해 주고 나머지는 행영(行營)으로 돌아간 후 통지를 만나면 해결하겠다고 보류했다.
== 은퇴 ==
[[1260년]](원종 1) 음력 12월 정당문학이부상서(政堂文學吏部尙書)에 오르고, [[1261년]] 음력 5월에는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로서 지공거가 되어 과거를 주관하였다.
만년에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청하자, 조정에서는 수태부 중서시랑평장사(守太傅中書侍郎平章事)로 치사(致仕)하고 오산군(鰲山君 : 鰲山은 지금의 청도군)에 봉하였다.
 
과연 행영으로 돌아온 후 통지가 찾아오자, 그를 결박하여 죄를 묻고 강물에 던져 죽였다.
1266년(원종 7) 77세로 세상을 떠나니 조정에서 영헌(英憲)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의 무덤은 현재 경상북도 청도군 청도읍에 있다.
 
이에 만전은 김지대에게 감정을 품었으나, 그가 청렴하고 조심성이 있으며 허물이 적었으므로 마침내 해치지 못했다.<ref name=a/>
== 평가 ==
김지대에 대한 행장(行狀)은 [[정인지]]의 《고려사》, [[김종서]]의 《고려사절요》, [[서거정]]의 《동국통감》 등에 적혀있다. 청백리이며 공명정대하게 정사를 수행했던 재상이다. 고려시대 10대 시인에 꼽히며, [[조선 성종]] 때 대학자인 서거정이 저술한 《동문선》에도 그의 시가 여러 편 실려있을 정도로 문학사적으로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
 
[[1243년]](고종 30) 비서소감(秘書少監)으로서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최린]](崔璘)과 함께 몽골로 가서 방물(方物)을 바쳤고<ref name=c>『고려사』 「고종세가」</ref>, [[1255년]](고종 42) 판사재시사(判司宰寺事)로서 문과의 동지공거(同知貢擧)를 맡아 [[곽예|곽왕부]](郭王府) 등 37명에게 급제를 주었다.<ref name=b/>
[[파일:pic55up3.jpg|thumb|355px|김지대의 묘]]
 
[[1258년]](고종 45) 5월 북계지병마사(北界知兵馬事) 홍희(洪煕)가 여색을 즐기고 군무를 돌보지 않아 그 지방의 민심이 떠나자, 조정에서 당시 판비서성사(判秘書省事)로서 있던 김지대를 재략(才略)이 있다 하여 첨서추밀원사(簽書樞密院事)로 승진시키고 진(鎭)으로 나가게 했다.
== 참고자료 ==
 
* 정인지 外, <<고려사(高麗史)>>, 권 102 김지대(金之岱) 열전(列傳)
김지대가 은혜와 믿음으로 민심을 어루만지니, 서북의 40여 성이 이에 힘입어 편안해졌다.<ref name=a/>
* 김종서 外,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서거정 <<동국통감(東國通鑑)>>
11월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12월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ref name=c/>, [[1260년]](원종 원년) 정당문학(政堂文學)·이부상서(吏部尙書)를 차례로 거쳤다.<ref name=a/>
 
이듬해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로서 문과의 지공거(知貢擧)를 맡아 정겸(鄭謙) 등 31명에게 급제를 주었고<ref name=b/>, 얼마 되지 않아 퇴직을 청하자, 수태부(守太傅)·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가 더해지고 치사(致仕)했다.
 
[[1266년]](원종 7) 병이 들자 머리를 깎고 앉은 채 77세로 졸했으며, 영헌(英憲)이라는 시호를 받았다.<ref name=a/>
 
== 각주 ==
줄 46 ⟶ 48:
[[분류:과거 급제자]]
[[분류:청도 김씨]]
[[분류:수원 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