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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마지막으로 성공한 잉글랜드 침공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ref>네덜란드의 총독이었던 오랜지공 윌리엄의 즉위를 [[노르만 왕조]]의 [[정복왕 윌리엄]]에 빗댄 것이다.</ref> 한편 명예혁명은 영국의 [[의회 민주주의]]를 출발시킨 시발점이 되었다. 이후 어떠한 영국의 왕조도 의회를 무시하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할 수는 없었다. 또한 당시 작성된 [[1689년 권리장전]]은 [[영국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영국의 역사}}
[[파일:William and Mary Guinea 612668.jpg|left|thumb|[[잉글랜드의 윌리엄 3세|윌리엄 3세]]와 [[잉글랜드의 메리 2세|메리 2세]]가 그려진 금화]]
'''명예혁명'''(名譽革命)은 [[영국]]에서 [[1688년]]에 일어난 [[혁명]]이다. [[의회]]와 [[네덜란드]]의 [[잉글랜드의 윌리엄 3세|오랜지공 빌럼]]이 연합하여 [[잉글랜드의 제임스 2세|제임스 2세]]를 퇴위시키고 잉글랜드의 윌리엄 3세로 즉위하였다. 이때 일어난 혁명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명예롭게 이루어졌다' 고 해서 명예혁명이라 이름붙였다. 명예혁명은 종종 '''무혈혁명''', '''1688년 혁명'''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무혈혁명은 말 그대로 무력충돌 없이 이루어진 혁명을 뜻하는 것이나, 이는 단지 [[잉글랜드]]에 국한된 것이었다. [[아일랜드]]에서는 세 번의 대규모 무력 충돌이 있었으며<ref>
이를 [[재커바이트의 반란]]의 시작으로 보기도 한다.</ref> [[스코틀랜드]]에서도 수차례의 무력 충돌이 있었다.<ref>
당시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는 동일한 왕에 의해 통치되었으나 여전히 별개의 왕국이었다. 1707년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웨일즈가 통합왕국이 되어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이 되었으며, 1800년 아일랜드를 통합하여 영국의 정식명칭은 그레이트브리튼과 아일랜드 연합 왕국이 되었다.</ref> 잉글랜드에서조차 양 진영의 군대에 의해 두 차례의 충돌이 있었으며, 여러 도시에서 [[로마 가톨릭]]에 반대하는 봉기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688년의 혁명은 [[1685년]]에 있었던 [[몬머스 반란]]에 비해 희생자가 매우 적었기 때문에 무혈혁명이라 불리게 되었다. [[영국 의회]]는 이 사건을 여전히 무혈혁명이라 부른다.
 
명예혁명은 유럽 대륙의 [[대동맹전쟁]]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으며 종종 마지막으로 성공한 잉글랜드 침공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ref>
네덜란드의 총독이었던 오랜지공 윌리엄의 즉위를 [[노르만 왕조]]의 [[정복왕 윌리엄]]에 빗댄 것이다.</ref> 한편 명예혁명은 영국의 [[의회 민주주의]]를 출발시킨 시발점이 되었다. 이후 어떠한 영국의 왕조도 의회를 무시하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할 수는 없었다. 또한 당시 작성된 [[1689년 권리장전]]은 [[영국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 배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