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은 (당나라):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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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회주(懐州) 하내(河内, 지금의 [[허난 성]](河南省) [[친양 시]]沁陽市) 사람으로, 아버지 이사(李嗣)는 당의 종실(宗室)에 해당했지만 그 무렵에는 몰락하여 현령(県令)이나 감찰사(監察史), 절도사(節度使)・주자사(州刺史)의 막료 같은 지방관료로 지내고 있었다. 이상은의 나이 10세에 아버지를 병으로 잃고, 다른 두 동생과 여섯 명의 자매가 남아 있었다.
 
당시 궁정 관료들은 [[우승유]](牛僧孺)・이종민(李宗閔) 등을 중심으로 하는 과거 급제자의 파벌과 [[이덕유]](李徳裕)가 거느린 문벌 귀족 출신자의 파벌로 나뉘어 정쟁을 벌이고 있었다. 우(牛)·이(李)의 싸움이라고 불리는 이 정쟁 가운데, 우승유파의 중진이었던 흥원윤(興元尹) 산남서도절도사(山南西道節度使) 영호초(令狐楚)의 비호를 받아 [[837년]]에 26세로 진사에 급제하였다. 그러나 영호초가 그 해에 사망하고 이듬해에는 상급 시험에도 낙방하여, 다시 이덕유파였던 태원공(太原公) 왕무원(王茂元)의 부름에 응하여 그의 비호를 받게 되고 왕무원의 딸까지 아내로 맞아들였다. 839년에 왕무원의 천거로 문인관료로서는 가장 이상적인 자리로 선망받던 [[비서성]](秘書省)의 교서랑(校書郎)이 되지만, 우승유파는 예전 영호초의 비호를 받았던 이상은을 은혜를 저버린 배은망덕한 자로 몰아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