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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주가 있던 지역은 유사 이래 [[마한]]의 북쪽지역이었다. 그 이북에는 [[고조선]], [[낙랑군]]이 있었다. 기원전 1세기 후반에 [[온조왕]]이 이끄는 [[부여족]] 일파가 [[한강]] 유역으로 남하하자 [[낙랑]]과 [[말갈]]의 침입으로부터 방패막이로 사용하려는 마한의 의도<ref>18년([[기원전 1년]]) 10월, [[말갈]]이 습격을 하여 임금이 병사를 거느리고 칠중하([[임진강]])에서 맞아 싸웠다. 추장 소모(素牟)를 사로잡아 [[마한]]으로 보내고 나머지 적들은 모두 묻어 죽였다.《[[삼국사기]]》 제23권 백제본기 제1.</ref>로 서울 [[송파구]], [[강동구]]를 중심으로 [[백제]]를 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백제는 한강 일대를 손안에 넣고 급속히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해 [[마한]] 연맹체를 [[노령산맥]] 남쪽으로 밀어냈다.
 
[[314년]] [[고구려]] [[미천왕]]이 [[낙랑군]]에 이어 [[대방군]]을 병합함으로써, 고구려와 백제는 패수([[예성강]](백제의 패수)에서 국경을 접했다. 두 나라는 백제 [[근초고왕]]이 [[371년]] [[평양성]]을 공격해 [[고국원왕]]을 전사시킨 이후 서로 영토를 뺏고 뺏기면서 항쟁을 벌이다가, [[475년]] 고구려 [[장수왕]]이 한성(漢城, [[하남위례성]])을 점령하고 백제를 현재의 [[경기도]] 지역에서 완전히 밀어내기에 이르렀다. 그 후 백제는 [[551년]] 한성 지역을 잠시 회복했지만 이내 신라가 점령해 신주(新州)를 설치하였다.
 
=== 한산주 ===
한산주의 치소 일대는 원래 [[백제]]의 수도 [[한성]]에 속하는 지역이었다. [[고구려]] [[장수왕]] 이후 고구려가 점령하여 한산군(漢山郡)을 설치하였고, [[백제 성왕]] 때 일시 회복했다가 [[553년]] 신라 [[진흥왕]]이 백제와의 동맹을 깨고 이 지역을 취하였다. 진흥왕은 이곳에 신주(新州)를 설치하여 백제로부터 빼앗은 지역을 관할하게 하였다.<ref>14년 가을 7월, 백제의 동북쪽 변두리를 빼앗아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아찬 무력을 군주로 삼았다.(十四年 秋七月 取百濟東北鄙 置新州 以阿飡武力爲軍主.)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4 진흥왕</ref> [[557년]](진흥왕 18년) 신주를 북한산(北漢山, 현 [[진흥왕서울]] 18년[[한강]] 이북 지역)으로 옮겼는데,<ref>18년, 신주를 북한산주폐하고 북한산주를 설치하였다.(十八年 廢新州 置北漢山州) 개칭하였는데,《[[삼국사기]]》 신라본기 제4 진흥왕</ref> 이후에는 전세(戰勢)에 따라 [[6정#한산정|치소]](治所)가 이동하면서이동해 [[한강568년]](진흥왕 유역에서는29년)에는 북한산주와[[남한강]]의 남천(현 [[경기도]] [[이천시]])으로 옮겼다가<ref>29년 겨울 10월, 북한산주를 없애고 남천주(南川州)를 설치하였다.(二十九年 冬十月 廢北漢山州 置南川州)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4 진흥왕</ref> [[604년]]([[진평왕]] 26년)에 다시 한산정(漢山停, [[이천시경기도]] [[하남시]] 일대) 폐치분합설치하였다.<ref>26년 가을 7월, 남천주를 없애고 북한산주를 다시 설치하였다.(二十六年 秋七月 南川州 還分合北漢山州.) 반복되다가,《[[삼국사기]]》 신라본기 제4 진평왕</ref><ref>남천정을 두었다가 진평왕 26년에 남천정을 폐지하고 한산정을 두었다.(置南川停 眞平王二十六年 罷南川停 置漢山停.) 《[[삼국사기]]》 제40권 잡지 제9(신라 무관 3)</ref> [[백제]]가 망하고 4년 뒤인 [[664년]]([[문무왕]] 4년)에야 비로소주의 한산주(남한산주)로명칭이 한산주로 정리되었다. [[757년]]([[경덕왕]] 16년)에 전국의 행정구역 명칭을 중국식 한자어로 고치면서 '한산주'도 '한주'로 개칭되었다. [[혜공왕]] 때 행정구역 명칭을 원래 명칭으로 되돌렸다고 한다. [[고려]] 때에 [[광주군 (경기도)|광주]](廣州)로 개칭하였다.
 
한산주는 [[신라의 삼국통일|삼국 통일 전쟁]] 및 [[나당 전쟁]] 시기에도 영역이 계속 변화하였는데, 황해도 지역은 나당 전쟁 직후까지 군·현이 설치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다가 이후 영역을 정리하고 군·현을 설치하였다. [[694년]]([[효소왕]] 3년)에 송악성(松岳城 : [[개성시]])과 우잠성(牛岑城)을, [[703년]]([[성덕왕]] 2년)에 개성(開城)을 쌓았고, [[748년]]([[경덕왕]] 7년)에 14개 군·현을 설치하였으며, [[762년]]에도 6개의 성을 쌓았다. [[헌덕왕]] 때 취성군(取城郡)을 설치하고 [[826년]] [[대동강|패강]]에 길이 300리의 장성(長城)을 쌓아 한산주의 북쪽 경계가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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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강진 ===
신라는 황해도지역을 영토화하면서 이를 방어하고 동시에 적극적으로 북방으로의 진출을 꾀하고자 고구려의 옛 수도인 평양 부근<ref>패강은[[통일신라]]의 패강(패수)은 [[대동강]]을 가리키므로, 대동강 하류와 가까운 [[황해도]] [[봉산군]]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다.</ref>에 [[패강진]]을 설치했다. 이로써 신라는 살수(薩水)유역까지 가시권에 넣게 되었고 발해와는 평북일대를 중립지대로 두고 접했다.<ref>조이옥(2001)통일신라의 북방진출 연구</ref> 나중에 신라가 쇠퇴하면서 이 지역은 무주지(無主地)가 되어 황폐화 되었다가 후삼국시대에 고려의 영토가 되어 서경(西京)으로 승격되었다.
 
=== 한산주 이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