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전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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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노예들은 굉장히 열등한 존재이기 때문에, 백인들이 가진 권한을 동일하게 가질 수 없다.|1857년 연방 대법원 판결문}}
 
이 판결에서 대법원은 북위 36˚ 30' 위에 위치한 북부의 영토 내에서 노예제도를 금지한 [[미주리 타협]]도 역시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판결문에서 [[로저 토니]]는 "북위 36˚ 30' 위의 북부 영토에 거주하는 시민들의 노예 소유를 금지하는 의회의 결정은 헌법에 근거하지 않은 사항이기에 이를 무효로 한다"고 판시했다. 이러한 태니의 판결에 대해 민주당원은 열렬한 지지를 보냈지만 공화당원들은 이 결정에 '자의적인 헌법의 왜곡'이라고 반발했다. 공화당원들은 드레드 스콧이 법적으로 소송을 제기 하지 못한다면 대법원은 [[미주리 타협]]의 합헌성에 대해 논할 권리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에이브러햄 링컨|링컨]]은 "또 다른 드레드 스콧 판결"이 북부의해져북부의 노예주들을 해방을노예제도로써 이끌고,위협할 결론적으로 다른있다고 남부주들에서도 연쇄적으로 노예 해방이 일어나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분리론자들은 공화당원들이 힐튼 로완 헬퍼 같은 노예제에 반대하는 남부 백인들과 남부의 노예들을 선동하기위해 유화정책을 사용하는 것도 겁내고 있었다경고했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노예제와 관련된 문제는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고, 이제는 이 사안이 너무 중요해졌기에 다른 어떤 국가적 문제도 지금은 심리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말했다. 노예제 문제는 준주의 지배권 획득을 위한 민주당 내 파벌 경쟁과 관련이 있었고, 이 준주에서 노예 소유 규정을 명시하는 데 대한 남부 노예 소유주들의 요구는 [[민주당 (미국)|민주당]]을 둘로 나누기위해 남부의 정치인들이 사용했던 쟁점이었다. 하지만 둘로 나뉜 민주당은 [[에이브러햄 링컨|링컨]]의 당선과 연방 분리라는 결과를 낳았을 뿐이었다. 연방 분리가 화두로 떠올랐을 때, [[사우스 캐롤라이나]]의 대농장 지주이자 상원의원인 [[존 타운샌드]]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인용문2|우리의 적인 [[공화당 (미국)|공화당]]이 정부를 그들의 손아귀에 넣기 직전이다. 공화당은 변덕스럽고 광적인 이론과 노예제 폐지라는 목적에 따라 우리를 지배할 작정이다.}}
 
위와 비슷한 의견들은 논평과 정치적 연설 그리고 연방 탈퇴에 대한 이유를 밝히는 선언문을 통해 남부 곳곳에서 표출되었다. 비록 [[에이브러햄 링컨|링컨]]은 노예제가 이미 존재하는 주에서 이를 비합법화 하려는 계획이 전혀 없었지만, 남부 전역에 걸쳐 백인들은 노예제도의 미래에 대한 우려를 표했다.
 
남부군이 걱정 했던 것들은 노동력을 잃음으로써 겪게 되는 경제적인 손실뿐만 아니라 인종 평등의 두려움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텍사스 주]]는 연방탈퇴의 이유로 [[아프리카]] 민족이 백인의 하위 민족으로 정당하게 여기어지고 있어서 반노예를 추구하는 주들이 백인의 평등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일을 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앨라배마 주]]의 분리론자 [[에드먼드 다르간]]은 백인들과 자유를 얻은 흑인들이 절대로 같이 살수 없다고 경고했다. 그리고 만약에 흑인들이 자유의 몸이 되어 남부지방에서 살아갈 경우, 결과를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인용문2|우리가 직접 우리의 노예에 대한 형벌 집행자가 될 것이다. 북부지방의 정책은 이런 결과를 초래할 것이며, 우리는 더 가난해질 뿐 아니라 범죄를 저지르게 될 것이다.}}
 
[[1830년대]] 초반부터 미국 우정 공사 총재는 남쪽으로 보내지는 노예제도 폐지의 관한 모든 우편물을 전송하기 거부하였다. 남부지방에 사는 북부지방 출신의 선생들은 노예제도 폐지를 지지하는 기미가 조금이라도 보이면 쫓겨났고 또 노예제도 폐지론에 관한 책들은 모두 금지되었다. 그리고 남부지방의 백인들은 공화당이 노예제도 폐지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믿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북부 주들도 위협을 느꼈다. [[에릭 포너]] 에 의하면 북부지방 사람들이 노예제도를 정의에 반대되는 것이라고 보았고, 또한 그들의 근본적인 가치관과 관심사를 위협하는 것으로 보았다고 한다. 이러한 마찰들과 의심들과 근심들은 전쟁이 터지는 데에 아주 큰 기여를 하였다.
 
[[에이브러햄 링컨|링컨]]은 현재 노예제가 존재하는 주에서의 노예제 시행을 보호하는 내용을 담은 《코윈 헌법 수정안》에 찬성했지만, 분리주의자들은 그마저도 무의미하다고 주장했다. 분리주의자들은 자유의 땅을 주창하던 북부주에게 [[캔자스 주]]를 빼앗기자, 캔자스에 인접한 주에서 노예가 부족해져 노예 해방을 이끌고, 결론적으로 다른 남부주들에서도 연쇄적으로 노예 해방이 일어나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분리론자들은 공화당원들이 힐튼 로완 헬퍼 같은 노예제에 반대하는 남부 백인들과 남부의 노예들을 선동하기위해 유화정책을 사용하는 것도 겁내고 있었다.
 
=== 남북 지역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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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역사가들은 두 지역간에 사회, 문화적 환경이 매우 달랐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남부에서 부자들이 모든 옥토를 소유하고 있었고, 가난한 백인 농부들은 생산성이 적은 자투리 땅을 가지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노예 [[반란]]에 대한 두려움과 노예 해방 주의자들의 [[선전]]물은 남부의 군대를 노예 해방주의를 비롯한 모든 "주의"에 대해 적대적으로 만들었다.
 
남부인들은 자신들은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주장한 ‘공화적 가치’(republican value)에 충실한 반면, 북부가 변화하고 있고, 새로운 "주의" 따위에 너무 쉽게 변한다고 불평했다. ([[조지 워싱턴|워싱턴]], [[제퍼슨]], [[메디슨]] 등 많은 건국의 아버지들은 노예를 소유하고 있었다.) [[에이브러햄 링컨|링컨]]은 공화당원들이 노예제의 확장을 막음으로써 헌법 입안자들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고 말했다. 노예제를 받아들일 것이냐에 대한 문제는 [[감리교]], [[침례교]], [[장로교]]와 같은 큰 [[개신교]] 종파들을 북부와 남부 종파로 가르게 되었다. 산업화로 인해 8명의 유럽 이민자 중 7명은 북부에 정착했다. 이 시기 북부에서 남부로 이사하는 백인들보다 남부에서 북부로 가는 백인들이 두 배가량 많았기 때문에, 이런 인구의 이동 문제 역시 남부인들이 방어적이면서도 호전적인 정치적 모습을 보이는데 일조했다.정안과 크리텐던 타협안을 통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타협은 실패했고, 남부 지도자들은 링컨이 노예제 확장을 중단하고 폐지시킬까 걱정을 하였다. 노예제가 존재하던 주들은 하원에서 이미 소수파로 전락하였고 세력이 늘어나는 북쪽과는 대조적으로 의회와 대통령 선거인단에서 앞으로도 계속 소수파로 남게 될 위기를 맞게 되었다.에 찬성을 했다. 처음에는 새로운 정부를 카나와(kanawha)로 부르자고 했지만 [[1863년]] [[6월 20일]]에서 조합에서 [[웨스트 버지니아]]로 명명하기로 결정했다. 그 해 말에는 제퍼탈퇴를 선언을 했고, [[1861년]] 2월엔 남부의 여섯 개 주가 미합중국 탈퇴를 선언 했다. 같은 해 [[2월 7일]]에 일곱 개 주가 [[미국 남부 연합|남부 연합]]의 임시헌법을 채택했고, 또한 그 일곱 주의 주도로 [[앨라배마 주]]에 있는 [[몽고메리 (앨라배마 주)|몽고메리]]를 임시수도를 삼았다. [[1861년]] 2월 [[워싱턴DC|워싱턴]]에서 열린 전쟁 전 평화회담은 위기상황을 극복하지 못한 채 결렬됐다. 남아있는 여덟 개의 노예제를 찬성하는 주는 남부연합 가입을 거절했다. 남부 연합의 군사력은 남부 경계선 안에 있는 대부분의 요새를 장악했다. 이에 맞서 [[제임스 뷰캐넌|뷰캐넌]] 대통령은 보급선 《스타오브 더 웨스트 호》를 [[섬터 요새]]에 보내 저항을 시도 했다. 그러나 요새에 도착하기도 전에 남부 캐롤라이나군에 의해 보급선이 불타버려 어떠한 군사적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작전에 실패했다. 그러나 [[매사추세츠 주|매사추세츠
 
=== 각 주의 권한 ===
각 주가 특정한 권한들을 가졌다는 데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하지만 주의 주민이 그 주를 떠났을 때도 이 권한이 지속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었다. 남부는 모든 주의 시민들이 자신의 재산을 소유할 수 있는 권리를 가졌고, 주를 벗어난다고 그 재산을 빼앗길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특히 노예주들이 노예를 데리고 미국 내 어디든 돌아다닐 수 있으며 그 노예는 자유주에서도 노예로 남아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북부 사람들은 이 권리를 부정하며, 이는 자유주들이 각 주에서 노예제를 금지할 권한에 위배된다고 반발했다. 노예제를 확장시키는데 반대했던 공화당 당원들은 특히 노예를 데리고 자유주와 준주들을 다닐 수 있는 권리에 반대했다.<ref name="Forrest McDonald 2002">Forrest McDonald, ''States' Rights and the Union: Imperium in Imperio, 1776-1876'' (2002)</ref>
 
남부인들은 각 주가 미연방에서 탈퇴할 권한이 있다며, 미국 헌법은 단지 주들간의 협약의 축약판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제임스 뷰캐넌|뷰캐넌]] 대통령을 비롯한 북부인들은 이를 두고 "영구 연합"을 위해 노력했던 미국 조상들의 정신에 위배된다며 각 주들이 연방에서 탈퇴할 권한이 있다는 의견에 반대했다.<ref name="Forrest McDonald 2002"/>
 
=== 링컨의 대통령 당선 ===
[[1860년]]에 있었던 [[에이브러햄 링컨|링컨]]의 당선은 남부의 연방 탈퇴의 시발점이 되었다. 코윈 수정안과 크리텐던 타협안을 통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타협은 실패했고, 남부 지도자들은 링컨이 노예제 확장을 중단하고 폐지시킬까 걱정을 하였다. 노예제가 존재하던 주들은 하원에서 이미 소수파로 전락하였고 세력이 늘어나는 북쪽과는 대조적으로 의회와 대통령 선거인단에서 앞으로도 계속 소수파로 남게 될 위기를 맞게 되었다.
 
== 연방 탈퇴 ==
=== 사우스캐롤라이나의 탈퇴 ===
[[사우스캐롤라이나]]는 다른 어떤 연방 주보다 무효화와 탈퇴에 적극적이었다. 사우스 캐롤라이나는 [[1860년]] 12월 《연방 탈퇴의 원인과 정당성에 대한 즉각적인 원인의 선언》을 채택했다. 그것에는 ‘남부에서의 노예주에 대한 권리’를 담고 있었지만, [[도망노예법]]을 지정한 북부의 권리에 대한 비난을 담고 있었다. 그들은 북부의 주가 헌법 하의 연방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남부 주의 권리에 대한 모든 침해는 노예제도와 관련되어 있었다.
 
=== 탈퇴무렵 ===
[[에이브러햄 링컨|링컨]]이 대통령으로 취임하기 전, 일곱 개의 주들은 북부 연방으로부터의 분리 독립을 선언했다. 그 일곱 주들은 [[1861년]] [[2월 4일]]에 남부 정부인 ‘[[아메리카 연합국]]’(Confederate)을 설립하였다. [[1861년]] [[3월 4일]]부로 재임 기간이 끝남으로서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는 [[제임스 뷰캐넌]]이 작게 반발했음에도, 일곱 개의 주들은 자신의 주 경계내의 연방 정부 요새와 그 외 모든 재산 통제권을 장악하였다. 뷰캐넌이 말하길, [[드레드 스콧]]의 결정은 남부가 분리 독립할 이유가 없었다는 것의 증거이고, 북부 연방이 “영속적이 되도록 의도”되었지만 “무력으로 주가 북부 연방에 남도록 하는 것은 의회에 허락된 권력이 아니라고 하였다.” 텍사스에 있는 전체 주둔지에 있는 미군의 1/4은 사령관 데이빗 E. 트윅스의 주 세력에 항복하였고, 데이빗 E. 트윅스는 이후, 남부 연방에 합류하였다. 남부사람들이 상원과 하원의 자리에서 사임하면서 분리 독립은 이후, 공산당원들이, 전쟁 전 남부 상원들이 반대하였던 프로젝트를 위한 법안을 통과시키는 것을 가능케 하였는데 이 법안에는 《모릴 관세》, 《토지부여대학》(모릴법), 《[[홈스테드법]]》, 《대륙횡단철도》(태평양 철도법), 《국립은행법》, 그리고 [[1862년]] 《법정통화법》의 허가가 포함된다. [[1861년]]의 수입법은 전쟁의 자금을 대기 위하여 [[소득세]]를 도입시켰다.
 
=== 아메리카 연합국 ===
7개의 딥 사우스 코튼 주들은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사우스 캐롤라이나]], [[미시시피 주|미시시피]], [[플로리다 주|플로리다]], [[앨라배마 주|앨라배마]], [[조지아 주|조지아]], [[루이지애나 주|루이지애나]] 그리고 [[텍사스 주|텍사스]]의 순으로 [[1861년]] 2월까지 분리 독립하였다. 그래서 남부는 우선 7주가 독립하면서 1861~1863년까지 남부국기가 별이 7개가 있는 국기와 함께 [[파일:CSA FLAG 4.3.1861-21.5.1861.svg|22px]] [[아메리카 연합국]]이라는 새로운 남부 국가명이 탄생하였다. 그리고 이 일곱 개의 주들은 [[제퍼슨 데이비스]]를 대통령으로 하는 [[아메리카 연합국]]과 미국 헌법을 모델로 한 정부의 구조를 형성하였다. 섬터 요새에의 공격 이후, 링컨 대통령은 각각의 주로부터 의용군을 요청하는데, 그 후 2개월이 되지 않아 네 개의 [[노예주]]인 [[버지니아 주|버지니아]], [[아칸소 주|아칸소]], [[노스 캐롤라이나 주|노스캐롤라이나]]와 [[테네시 주|테네시]]가 분리 독립을 선언했고 남부군에 합류했다. [[1863년]] [[6월 20일]], [[버지니아 주]] 북서부 지방은 버지니아로부터 분리 독립하여 새로운 주인 웨스트 버지니아로 북부 군에 합류했다. 그래서 남부 국기도 주가 더 늘었다는 이유로 완전히 다른 국기로 변경되었는데 바로 [[파일:Flag of the Confederate States of America (March 4, 1865).svg|22px]] [[남부맹방]]을 상징하는 국기가 새로 탄생하였다. [[1861년]] 말 [[미주리 주]]와 [[켄터키 주]]는 남부군 정부를 추방하고 북부군의 실효적 지배하에 있게 되었다.
 
=== 아메리카 합중국 ===
23개 주([[캘리포니아 주|캘리포니아]], [[코네티컷 주|코네티컷]], [[델라웨어 주|델라웨어]], [[일리노이 주|일리노이]], [[인디애나 주|인디애나]], [[아이오와 주|아이오와]], [[캔자스 주|캔자스]], [[켄터키 주|켄터키]], [[메인 주|메인]], [[메릴랜드 주|메릴랜드]], [[매사추세츠 주|매사추세츠]], [[미시간 주|미시간]], [[미네소타 주|미네소타]], [[미주리 주|미주리]], [[뉴햄프셔 주|뉴 햄프셔]], [[뉴저지 주|뉴저지]], [[뉴욕 주|뉴욕]], [[오하이오 주|오하이오]], [[오리건 주|오리건]], [[펜실베이니아 주|펜실베이니아]], [[로드아일랜드 주|로드 아일랜드]], [[버몬트 주|버몬트]], [[위스콘신 주|위스콘신]])는 북부군의 지배 하에 남아 있었다. 전쟁 중에 [[네바다 주|네바다]]와 웨스트 버지니아는 북부 군의 새 주로 합류했다. [[테네시 주|테네시]]와 [[루이지애나 주|루이지애나]]는 전쟁 초기에 북부 군의 군사적 지배 하로 반환되었다. [[콜로라도 주|콜로라도]], 다코타, [[네브래스카 주|네브래스카]], [[네바다 주|네바다]], [[뉴멕시코 주|뉴멕시코]], [[유타 주|유타]]와 [[워싱턴 주|워싱턴]] 지역은 북부 군쪽에 서서 싸웠다. 몇몇 노예 소유의 미국 원주민 부족은 남부 군을 지원했고, 소규모의 살벌한 전쟁이 있었던 현재 오클라호마라고 불리는 indian의 영토를 주었다. 그리고 당시에 [[1861년]]부터 [[1863년]]까지 {{국기|미국|1861}}은 34개 주 정도였다. {{국기|미국|1863}}은 [[1863년]] [[1월 1일]]에는 [[링컨]] 대통령이 [[흑인]] [[노예 해방]]을 선언하였다.
 
=== 경계지역의 주(州)들 ===
{{참고|경계주}}
남부 주 가운데 연방 탈퇴 보다는 북부의 자유주와 타협했던 주들은 버지니아에서 분리되어 독립적인 하나의 주가 된 웨스트버지니아와 최북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노예상태에 있던 [[메릴랜드 주]], [[델라웨어 주]], [[미주리 주]] 그리고 [[켄터키 주]]였다.
 
[[메릴랜드 주|메릴랜드]]는 남부맹방이었다. 그들은 다리를 불태우고 [[볼티모어]]에서 일어났던 반 북군 폭동을 견뎌냈었다. 그 때 [[에이브러햄 링컨|링컨]]은 [[계엄령]]을 선포했고 군대를 불렀다. 북쪽을 뚫어 버렸던 민병대는 [[워싱턴DC]]와 [[볼티모어]]를 향해서 돌진했다. 남부맹방은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고, [[에이브러햄 링컨|링컨]] 대통령은 [[메릴랜드 주|메릴랜드]] 정부 요원들을 체포했다. 체포당한 사람들은 재판의 절차 없이 잡아두었고, 그렇게 링컨 대통령은 메릴랜드와 콜럼비아 지역을 확실히 통제할 수 있었다.
 
[[미주리 주|미주리]]에서 회의가 열렸는데, 이곳은 북부진영에 남아있기로 결정했다. 남부맹방을 이끌었던 클레이본 F. 잭슨은 밀리티아 주로 갔었다. 이 때 연방 군대의 나대니엘 리옹 장군은 그곳을 공격했다. 그리고 캠프 잭슨 사건 이후에 나대니엘 리옹 장군은 그자를 쫓았다. 그리고 나머지 주는 남서부의 주의 경계 쪽을 방어했다. 이후 북군을 지지하는 회의는 다시 열렸고 미주리는 일시적으로 북부진영으로서 세력을 얻었다.
 
[[켄터키 주|켄터키]]는 일단 중립이라 선언했고 분리독립을 하지 않았다. 남부맹방 세력이 그곳을 [[1861년]] 9월에 처들어 갔을 때 그들은 중립임을 포기하면서도 노예 제도를 유지하려고 했다. 그리고 남부맹방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남부맹방 연합을 조직했고 주지사를 취임시킨 뒤 연방 정부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그렇지만 그 반정부 세력은 곧 탈퇴를 하였고, 켄터키를 다시는 통제하지 않았다.
 
[[버지니아 주|버지니아]]가 독립을 한 이후에 휠링(Wheeling)에 있는 북군 정부는 48개의 도시에 [[1861년]] [[10월 24일]]에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기 위한 법령에 투표할 것을 요청했다. 투표자의 34%가 주의 청원서에 찬성하였다(96%의 찬성) 그 결과, 많은 도시가 새로운 주의 건립에 찬성을 했다. 처음에는 새로운 정부를 카나와(kanawha)로 부르자고 했지만 [[1863년]] [[6월 20일]]에서 조합에서 [[웨스트 버지니아]]로 명명하기로 결정했다. 그 해 말에는 제퍼슨과 버켈리 주도 새로운 주로 합병되었다. 버지니아의 서쪽 국가들은 분리에 대해 겨의 2:1의 비율로 투표하였다, 비록 50국 중 24개국이 분리 쪽으로 투표하였지만. 웨스트버지니아의 군사들의 숫자는 남부맹방과 북부연방 사이에 균등하게 나뉘었다.
 
[[테네시 주]]에서 이와 비슷한 북부 연방주의자의 독립 시도가 있었으나 남부 연방주의자에 의해 저지 되었다. 제퍼슨 데이비스는 북부연방에 고위 관료로 추정되는 사람을 3000명 넘게 검거하고 재판도 없이 그들을 감금했다.
 
== 남북 전쟁 ==
전쟁 중 10,000건이 넘는 교전이 발생했었고 그 중 40%가 [[버지니아 주]]와 [[테네시 주]]에서 일어났다. 모든 주요전투와 많은 부차적인 전투들을 보도하던 기사들이 분열된 이후로 신문 기사는 큰 윤곽만을 보여 주게 되었다. 남북 전쟁 중 더 많은 전투 기록과 전쟁 중 군사지도력을 보여준다.
 
=== 전쟁의 시작: 1861년 ===
[[1860년]]에 [[에이브러햄 링컨|링컨]]이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자 [[사우스 캐롤라이나]]는 서둘러 [[미합중국]](유니언) 탈퇴를 선언을 했고, [[1861년]] 2월엔 남부의 여섯 개 주가 미합중국 탈퇴를 선언 했다. 같은 해 [[2월 7일]]에 일곱 개 주가 [[미국 남부 연합|남부 연합]]의 임시헌법을 채택했고, 또한 그 일곱 주의 주도로 [[앨라배마 주]]에 있는 [[몽고메리 (앨라배마 주)|몽고메리]]를 임시수도를 삼았다. [[1861년]] 2월 [[워싱턴DC|워싱턴]]에서 열린 전쟁 전 평화회담은 위기상황을 극복하지 못한 채 결렬됐다. 남아있는 여덟 개의 노예제를 찬성하는 주는 남부연합 가입을 거절했다. 남부 연합의 군사력은 남부 경계선 안에 있는 대부분의 요새를 장악했다. 이에 맞서 [[제임스 뷰캐넌|뷰캐넌]] 대통령은 보급선 《스타오브 더 웨스트 호》를 [[섬터 요새]]에 보내 저항을 시도 했다. 그러나 요새에 도착하기도 전에 남부 캐롤라이나군에 의해 보급선이 불타버려 어떠한 군사적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작전에 실패했다. 그러나 [[매사추세츠 주|매사추세츠]], [[뉴욕 주|뉴욕]], [[펜실베이니아 주|펜실베이니아]]의 주지사들은 아무도 모르게 훈련된 의용군과 무기들을 사들였다.
 
[[1861년]] [[3월 4일]], [[에이브러햄 링컨]]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취임 연설에서, 링컨 대통령은 헌법은 이전 연방의 법령보다 더 완벽한 연합이며, 의무를 부과하는 계약이라는 점에서 영구적인 연합이기도 하며, 모든 부분은 "법적으로 자유롭다."라고 하였다. 그는 남부를 공격할 의도도 없으며, 존재하는 노예제를 끝낼 의도 역시 없지만, 연방정부 재산의 소유를 지키기 위해 힘을 쓸 것이라 진술하였다. 그의 연설은 연합의 결속 재회복을 위한 탄언과 함께 끝맺었다. 남부는 대통령에게 대표를 보내었고 연방 자산을 지불하고 미국과 평화조약을 시작하였다. 링컨 대통령은 연합 의원과의 협상은 무조건 거절하였는데, 이는 남부연합 정부는 합법적인 정부가 아니며 이들과 조약을 체결하는 것은 이들을 완전히 독립된 정부로 인정하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주의 국무장관 [[윌리엄 슈워드]]는 비공식적이고 간접적인 협상을 유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사우스 캐롤라이나]] 찰스턴의 [[섬터 요새]], 피켄스 요새, 그리고 테일러 요새는 연방에 남아있는 요새였고, 링컨 대통령은 [[섬터 요새]]를 사수하기로 결정하였다.
 
[[파일:Confederate Batteries 2.jpg|right|thumb|남부 연합군에 의한 섬터 요새의 포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