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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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문의 건립은 1890년대 초 [[서재필]] 등 개화파에 의해 추진되었다. 이들은 [[영은문]]은 [[중국]]에 사대해온 치욕의 상징이므로 헐고,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의 상징을 건설하자고 [[대한제국 고종|고종]]에게 적극적으로 건의하기 시작하였다. 독립문은 [[영은문]] 맞은편이 예정지로 정해지고 시공되었으며, [[1896년]] [[11월 20일]] 건립되었다.
 
[[1895년]]부터 서재필은 독립문 건립을 위해 백성들의 성금을 모금하였고, 스위스계 우크라이나인우크라이나인인 세레딘사바틴을 영입해왔다. 서재필은 직접 독립문을 스케치하고 이를 토대로 공사를 시작한다.
 
[[청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 [[시모노세키 조약]]에서 조선의 독립이 국제법상 확정<ref>[[이토 히로부미]]와 [[리훙장]]이 교환한 조약문 제1항, '양국은 조선이 완전한 자주독립국임을 인정한다'에 근거함.</ref> 된 후, 건설이 시작되었다. [[1896년]]에 공사를 시작해 [[1897년]]에 완공되었다. 높이는 14.28[[미터]], 폭 11.48미터이다. 약 1,850개의 [[화강암]]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프랑스]] [[파리 시|파리]]의 [[개선문]]을 모델로 삼아서 만들었다. 현판은 [[김가진]]이 썼고, 현판 바로 아래에는 [[대한제국 황족|대한제국 황실]]을 상징하는 문양인 [[오얏]]꽃이 장식되어 있다. 앞쪽의 기둥 두 개는 옛날 영은문의 기둥으로서, 철거 후에도 남은 부분이다. 독립문의 기공식 때는 [[대한제국 고종]]을 비롯한 황족과 고관들이 모두 참여하였다. 이 중 [[김가진]]은 [[삼전도]]([[정축하성]])와 병자년([[병자호란]]), 정묘년([[정묘호란]])의 굴욕을 이제서야 깨트렸다며 크게 기뻐하였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