펑궈장: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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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참전 전투/전쟁 = [[청일 전쟁]]<br />[[러일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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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펑궈장'''({{zh|t=馮國璋|s=冯国璋|p=Féng Guózhāng}}, [[1859년]] [[1월 7일]] ~ [[1919년]] [[12월 12일]])은 [[중국]]의 [[군인]]이자, [[정치가]]이다. [[위안스카이]](袁世凱)의 수하로 활동하며 위안스카이 이후에는 [[
[[즈리 성]] 출신으로 [[1894년]] [[청일전쟁]] 후 [[무술정변]]때 [[위안스카이]]를 도왔다. [[신해혁명]] 후
== 생애 ==
[[허베이성]] 태생으로 [[북양군벌]]의 장군으로 경력을 쌓았다. [[1911년]]의 [[신해혁명]] 때에도 [[위안스카이]] 휘하에 있었다. 당시는 [[청나라]] 소속이었으므로, 처음에는 혁명군을 공격하였으나, 혁명이 성공하고 위안스카이가 [[중화민국]] 총통이 된 후에는
[[1916년]] 위안스카이 사후에 [[리위안훙]](黎元洪)이 총통이 되고, 펑궈장은 부총통이 되었다. 이듬해에는 [[장쉰]](張勳), [[캉유웨이]](康有爲) 등이 벌인 [[선통제]] 복위사건이 벌어져 약 열흘간 선통제가 실제로 복위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 일로 인해 리위안훙이 퇴임하고, 펑궈장이 [[7월 17일]]부터 [[1918년]] [[10월 10일]]까지 총통이 된다. 하지만 당시 의회의 승인을 받은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의 자리는 임시직이었다.
당시 세계는 [[1차대전]]에 접어들고 있었다. 당시 [[독일]]이 장쉰의 [[쿠데타]]를 측면지원한 것이 알려지자 중국은 대전에 뛰어들게 된다. 하지만 [[1917년]] 9월 [[쑨원]]이 [[광저우]]에 새로운 정부를 열고 [[베이징]]에 반대하기 시작한다. 당시 안휘파 군벌의 수장 [[돤치루이]](段祺瑞)는 국무총리의 자리에 있었는데, 그는 쑨원의 혁명파에 대한 강경 입장을 고수했을 뿐만 아니라 펑궈장의
펑궈장은 위안스카이와 리위안훙의 자리를 승계한 것이었기 때문에, 위안스카이의 원래 임기가 시작되는 1913년부터 세어 5년이 되는 [[1918년]] [[10월 10일]]에 퇴임하게 된다. 이후 병으로 고생하다가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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