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혜왕후: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오주형(토론)의 17503473판 편집을 되돌림
Choboty (토론 | 기여)
잔글 영어판 분류 정보를 이용.+분류:15세기 한국 사람; 예쁘게 바꿈
19번째 줄:
'''공혜왕후 한씨'''(恭惠王后 韓氏, [[1456년]] [[11월 8일]]([[음력 10월 11일]]) ~ [[1474년]] [[4월 30일]]([[음력 4월 15일]]))는 [[조선]] [[조선 성종|성종]]의 원비(元妃)이다. 시호는 '''휘의신숙공혜왕후'''(徽懿愼肅恭惠王后)이다. [[한명회]]의 딸로 언니이자 시숙모인 [[장순왕후]]와 마찬가지로 20세를 못 넘기고 요절했다. 본관은 [[청주 한씨|청주]](淸州)이다.
 
== 생애 ==
한씨는 상당부원군 충성공 [[한명회]](上黨府院君 忠成公 韓明澮)와 황려부부인 민씨(黃驪府夫人 閔氏)의 막내딸로 [[1456년]] 연화방(蓮花坊)에서 태어났다.<ref name="성종5">《성종실록》 5년(1474) 6월 7일 1번째 기사</ref> [[1467년]] [[1월 12일]] [[조선 세조|세조]]의 손자이자 [[의경세자]]의 아들인 한 살 연하의 [[조선 성종|잘산군]](乽山君)과 혼인했다.<ref>《세조실록》 13년(1467) 1월 12일 1번째 기사</ref> 이 해에는 잘산군의 형 [[월산대군|월산군]]과 누이 [[명숙공주]]도 혼인을 했는데 한명회의 집에 예단이 보내진 것은 월산군의 혼례가 있은 지 5일만이었다.<ref name="smh">신명호, 《조선왕비실록(숨겨진 절반의 역사)》 역사의 아침, 2007, p.198~ ISBN 9788995884966978-89-958849-6-6</ref> 훗날 공혜왕후의 지문에 따르면 잘산군의 배필로 한씨를 택한 것은 세조의 의향이었다고 한다.<ref name="성종5"/> 그러나 실제로는 잘산군의 어머니인 [[인수대비|수빈 한씨]]가 잘산군과 함께 피접을 나갔다가 허계지(許繼智)라는 사람의 집에서 그 수양딸이었던<ref>《성종실록》 1년(1470) 5월 28일 4번째 기사</ref> 한씨를 눈여겨보고 며느릿감으로 골랐다는 견해도 있다.<ref name="smh"/> 실제로 잘산군이 직계 왕손인 [[제안대군]]이나 형 월산군을 제치고 성종으로 즉위할 수 있었던 데에는 권신 한명회의 딸을 아내로 맞은 일이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ref>최선경, 《왕을 낳은 후궁들》 김영사, 2007, p.65, ISBN 9788934926689978-89-349-2668-9</ref><ref>강현식, 《심리학으로 보는 조선왕조실록》 살림, 2008, p.81, ISBN 9788952210180978-89-522-1018-0</ref> 한씨는 잘산군과 혼인 후 천안군부인(天安郡夫人)으로 불리다 [[1469년]] 잘산군이 [[조선 예종|예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자 왕비에 책봉되었다.<ref>《성종실록》 2년(1471) 1월 19일 1번 째기사</ref> 인수대비는 며느리들에게 무척 엄격한 시어머니였는데 한씨에게 중국의 현모양처들에 관한 이야기인 《열녀전》을 읽게 하는 등 유교 윤리에 따라 철저히 교육했다.<ref name="smh"/> 한씨가 자식을 두지 못하자 성종은 후궁을 들였는데 한씨는 싫어하는 내색 없이 그들에게 옷을 준비해서 내리고 그 뒤에도 패물 등을 선물했다.<ref name="성종5"/> 한씨는 [[1473년]] 음력 7월에 병으로 친정(한명회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는데, 성종이 하루 걸러 한명회의 집에 들러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ref name="성종5"/> 이후 회복하여 궁궐로 돌아왔으나, 이 해 12월에 병이 다시 도지고 말았다.<ref name="성종5"/> 병이 낫지 않을 것을 예감한 왕후 본인의 요청으로 [[1474년]] 음력 3월에 [[창덕궁]] 구현전(求賢殿)으로 처소를 옮겼고, 성종과 삼대비([[정희왕후]], [[소혜왕후]], [[안순왕후]])가 날마다 구현전으로 가 그녀를 보살폈다.<ref name="성종5"/> 친정 부모인 한명회와 부인 민씨도 입궐해 병을 돌보았지만 차도가 없었고 한씨는 죽기에 앞서 부모가 며칠째 밥을 먹지 못하는 것을 보고 밥을 먹도록 명했다.<ref name="성종5"/> [[1474년]] [[음력 4월 15일]], 19세의 젊은 나이로 훙서하였다.
 
이에 성종은 공경하고 유순하게 윗사람을 섬김을 공(恭)이라 하고, 너그럽고 부드러우며 인자함을 혜(惠)라 하여 공혜왕후(恭惠王后)의 시호를 올렸으며, 능호는 순혼(順魂, 나중에 순릉이 되었다), 전호는 소경전(昭敬殿)으로 정하였다. [[조선 연산군|연산군]] 4년(1498년)에는 휘의신숙(徽懿愼肅)이라는 존호가 더해지기도 했다.
26번째 줄:
[[종묘]] 정전(正殿)에 왕후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능은 [[경기도]] [[파주시]] 조리읍 봉일천리 [[파주삼릉]] 내에 위치한 [[순릉]](順陵)이다.
 
== 가족 관계 ==
{{Col-begin}}
{{Col-2}}
112번째 줄:
 
{{조선의 왕후와 대한제국의 황후}}
 
 
 
[[분류:1456년 태어남]]
줄 122 ⟶ 120:
[[분류:서울특별시 출신]]
[[분류:청주 한씨]]
[[분류:15세기 한국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