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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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조헌은 혼자 출발했고 충청도관찰사 [[허욱]]이 마지막으로 사람을 보내 가지 말라고 경고를 했으나 이마저도 무시했다. 그리고 [[윤국형]]이 이끄는 관군의 방해로 1000명의 의병이 700명으로 줄었으나 전 [[청주 전투]]에서 함께 싸웠고 [[영규]] 대사가 와 승병 600명과 합류해 총 1300명의 군사가 되었다.
 
조헌은 전라도 의병장 고경명이 1차 금산 전투에서 전사하자 청주성 탈환을 계획했다. 관군 및 영규대사가 이끄는 1000 승병과 합세해 청주를 탈환하였고 전라도로 향하는 왜군을 막기 위해 7백 의병을 거느리고 코바야카와 타카카게가 이끄는 1만 5천 왜군과 2차 금산 전투에서 분전[4]하다가분전하다가, 아들인 조극관과 영규의 800 승군을 비롯한 전 의병들과 함께 장렬히 전사하였다. 그리고 금산성 평야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고 화살이 떨어지고 왜군과 육박전을 벌여야 할 상황이 오자 주변 사람들이 조헌에게 피신하라고 말했으나 조헌은 이를 거절하고 직접 불을 치며 군사에게 독전하다가 결국 전사했고 승병을 이끌던 영규 대사도 전사했다.

야사에 의하면 비록 패했지만 이들이 죽기살기로 저항했기에 왜군도 수천여명이 죽을 정도로 피해가 커서 우두머리를 난도질했는데, 아들인 조극관을 우두머리로 알고 난도질을 했다고 한다 이들의 분전으로 왜군은 피해를 추스려야 했기에 호남 곡창 지대 방어에 큰 기여를 했다.
 
의병과 승병 모두 전사하고 일본군 역시 피해도 막대해 시체를 옮기는 데 3일이 걸렸으며 이후 700명의 시체들을 모아 '[[칠백의총]]' 이란 무덤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