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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오스트리아 지배 하의 서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지배 하의 동부 우크라이나가 각각 독립을 선언, [[1920년]]에는 동서 통일을 선언했으나 외부 군대의 침략으로 신생독립국 우크라이나는 오래 가지 못하였다. 결국 [[1922년]]에 서쪽은 폴란드, 동쪽은 [[소비에트 연방]]의 영토가 되었다. 소비에트 연방령 우크라이나는 [[1921년]]-[[1922년]] 간, [[1932년]]-[[1933년]] 간 두 차례에 걸쳐 큰 기근을 겪었다. 둘째 기근은 [[이오시프 스탈린|스탈린]]이 집단 농장 체제에 저항이 심했던 우크라이나에 대해 인위적으로 부른 기근으로 [[홀로도모르]](Holodomor)라 불린다. 이로 인한 사망자 수는 적게는 8백만 명에서 많게는 1천만 명 이상으로 추산되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역사}}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소비에트 연방은 폴란드를 침공, 우크라이나 서부를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일부로 만들었다. [[1941년]]에는 [[나치 독일|독일]]군과 추축군이 소비에트 연방의 [[적군]]을 쳐부수었다. 소비에트 연방이 '영웅 도시'라 칭한 키예프 전투에서는 66만 명이 넘는 소비에트 연방군이 포로로 잡혔다. 처음에는 우크라이나인들이 독일군을 '해방군'으로 환영했다. 그러나 나치 독일은 곧 대량 학살을 시작하여 [[유대인]]들과 우크라이나인 민간인들을 죽이거나 강제 추방하였다. 마을 전체를 태워 없애기도 하였다. 결국 우크라이나인들은 독일의 지배가 소비에트 연방의 지배보다도 악랄하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전쟁 중과 독일 치하의 민간인 사망자 수는 50만 명이 넘는 유대인들을 포함, 7백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갈리치아 지방에서는 폴란드인들과 우크라이나인들끼리 서로 집단 학살을 저지르기도 한 끔찍한 시기였다. 독일과의 전투로 소련군은 약 1천 100만 명의 사망자를 냈는데 그 중 4분의 일(270만 명)이 우크라이나계였다. 우크라이나 민족은 추축국을 상대로 전투를 벌인 첫 민족이 되었고([[카르파티아-우크라이나에서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으로 인한 피해도 엄청났다.
 
제2차 세계 대전 종결 후 소비에트 연방령 우크라이나는 서쪽으로 확장되어 우크라이나인들이 사는 땅을 거의 모두 포함하게 되었다. [[1954년]]에는 우크라이나에 의해 러시아 본토와 단절되어 있던 [[크림 반도]]가 러시아에서 우크라이나령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니키타 흐루쇼프]]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우애를 과시하기 위해 [[페레야슬라프 조약]](코자크 헤티만국이 모스크바 차르의 보호를 요청)의 300주년을 맞아 우크라이나에 크림 반도를 할양한 것이다. 이는 우크라이나 독립 후 양국 간의 분쟁 소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