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경기전 정전: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56번째 줄:
 
경기전은 그 주변 일대와 더불어 사적으로 지정된 외에 경기전 자체의 건물만은 [[1971년]] [[전라북도의 유형문화재]] 2호로 지정되었는데, 1990년부터 70억 원의 예산을 들여 경기전 서쪽에 위치하고 있던 중앙국민학교(현 전주중앙초등학교)를 성심여중고 부지로 이전하고 해당 부지에 사고, 전사청, 시위청, 수문장청 등을 복원한다는 계획이 세워졌으며, [[1991년]] 1월 9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301호 ~ 제400호)|대한민국 사적 339호]]로 승격되었고 [[2008년]] [[12월 1일]] [[보물]] 제1578호로 승격 지정되었다.
 
=== 경기전과 이문용 할머니 ===
경기전은 고종 황제의 서녀로 알려진 이문용이 만년을 보냈던 곳이기도 하다. 염(廉)씨 성을 가진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상궁]] 소생으로 알려진 이문용 할머니는 [[1917년]] 17세의 나이로 당시 [[김한규]]의 아들 김회진과 결혼했고 진명여고에 진학하기도 했지만, 김회진은 결혼 생활 3년만에 일본유학을 떠났다가 사망하고 그 해에 돌도 지나지 않은 어린 아이도 잃었다. 상궁 소생이었기에 황실 호적에 오르지도 못했고, [[상하이]](上海)로 피신했다가 해방 뒤에 시댁인 [[원산]]으로 돌아와서 두 명의 시동생과 함께 서울 명륜동에 자리를 잡았지만, 이북에 남아 좌익운동을 하던 시동생이 생활비로 쓰라며 가져다 주고 간 금덩이 때문에 간첩으로 몰려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간 옥살이를 했다. [[1950년]] 6월에 출감하자마자 발발한 [[6.25 전쟁]]으로 다시 [[부산]]으로 피신, 전쟁 뒤 [[강릉]]에서 셋방살이를 하다 다시 [[1960년]] 반공법 위반죄로 몰려 체포, 10년형을 얻도받고 전주교도소에서 복역, 1970년에 만기출소한 뒤 이리에서 삯바느질로 생계를 이었다.<ref>《동아일보》 1987년 3월 30일자 10면 기사.</ref>
 
이리천주교회 캐나다 선교사 구미해가 30만원을 주어 얻어준 이리시 갈산동 단칸짜리 셋방에서 손재봉틀로 삯바느질을 하면서 연명해오다 노쇠해져서 캐나다선교회 서울본부로부터 매달 1만원씩 생활비를 받아쓰면서 근근이 살아갔는데, [[1974년]] 이문용 할머니의 생애를 소재로 류주현이 극본을 쓴 일일극 《황녀》(皇女)가 [[MBC]]에서 방영되면서 이문용 할머니의 사연이 알려지게 되었고, 1975년 3월 18일 황안성 당시 전북지사가 이문용 할머니를 방문해 금일봉을 전하기도 했다. 호적이 없었던 이문용 할머니는 또한 새마을봉사회 이학선이 적극 주선해 주민등록증도 발급받을 수 있었다.<ref>《경향신문》 1975년 3월 21일자 7면 기사.</ref> 동시에 21일 전북문화공보실은 국유문화재였던 경기전 조경묘의 사용승인을 문화공보부에 요청하고 이문용 할머니가 고종의 딸이라는 사실을 확인해 생계유지비를 지원해줄 것을 요청, 5월 20일부터 이문용 할머니는 조경묘 수직사에서 살 수 있게 되었으며, 전주시에서 3만원, 전북도에서 1만원으로 총 4만원의 생계비가 매달 지급되었다.
 
다만 이문용 할머니가 정말 고종의 숨겨진 딸인지에 대해서는 생전은 물론 사후에도 논란이 있었는데, 생전에 이문용 할머니는 세 번 서울의 낙선재(樂善齋)를 찾아간 적이 있었지만 낙선재에서는 번번이 이문용 할머니의 방문을 거절했고, [[1974년]] 일반 면회객 자격으로 [[이방자]] 여사를 잠깐 만나기도 했다.<ref>《경향신문》 1974년 9월 17일자 8면 기사.</ref> [[1975년]]에는 드라마 황실 출연진들과 함께 [[홍유릉|홍릉]](洪陵)을 참배하기도 했다.<ref>《경향신문》 1975년 2월 1일자 8면 기사</ref> [[1983년]] 낙선재 전 비서실장 이공재와 고종의 당숙질(학부대신 [[이재곤]]의 아들) 이면용은 이문용 할머니의 얼굴이 고종과 꼭 닮았다며 "당시의 왕실 사정 때문에 기록에는 누락되었을지 모르지만 이문용 할머니는 틀림없는 고종의 딸"이라고 주장했다. 이문용 할머니는 1987년 3월 28일 조경묘 수직사 안방에서 향년 87세로 별세하였는데, 장례 일정이 발표되자 당시 낙선재 비서실장 이영주와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사무총장 이규성은 "이문용 할머니가 고종의 딸이라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이고, 고종의 정실은 물론 후실까지 포함해 6명의 부인에게서 얻은 13명의 고종의 후손 모두가 관련 기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원계보기략]]은 물론 왕실 기록의 가장 기본이자 소상한 내용을 담은 [[승정원일기]]에서조차 이문용 할머니가 고종의 친딸임을 입증할 수 있는 기록은 단 한 줄도 없으며, 고종의 막내딸이었던 덕혜옹주보다도 12살이나 위인 이문용 여사를 당시 왕실의 호적 관리 전담부서였던 종친부에서 빠뜨렸을 리가 없다고 보았다. 상궁 출신이었던 성왕염 할머니(1987년 당시 70세) 역시 "임금과 하룻밤만 자도 당호가 붙는 법인데 임신까지 했었다면 그것을 상궁들끼리 모를 리가 없다"며 이문용 할머니가 고종의 딸이라는 이야기는 헛소문일 뿐이라고 일축했다.<ref>《경향신문》 1987년 4월 1일자 7면 기사.</ref>
 
== 건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