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정교회: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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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시의 국교화 ===
[[988년]], [[키예프 대공국]]의 [[블라디미르 1세]]가 [[동로마 제국]]에서 파송된 성직자들에게서 세례를 받음으로서 정교는 루시의 국교가 되었다. 초기 루시 연대기에 따르면 블라디미르 대공은 어느 종교를 신봉할지 신하들과 논의한 끝에 루시인들의 기질에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정교에 귀의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그는 훗날 [[교회]]로부터 시성되어 최초의 루시인 성인이 되었다. 루시인들은 정교를 수용함으로써 비로소 고도의 문명을 전수 받을 수 있게 되었고, 각종 예식서, 교부들의 저작 등을 슬라브어로 읽게 되었으며, 이를 토대로 독자적인 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다. 그들이 사용한 슬라브어는 [[모라비아]] 지역에 파견되었던 [[성 키릴루스|성 키릴로스]]와 [[성 메토디우스|성 메토디오스]] 형제의 [[키릴문자키릴 문자]]에 기반하였던 것으로, 루시의 기독교 개종은 이 키릴 문자로 된 슬라브어의 정착을 영구히 확립시켰다. 따라서 교회전례들은 [[민중]]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슬라브어로 거행되었다.
 
1015년 블라디미르의 죽음은 곧 내란으로 이어졌다. 블라디미르의 아들 중 스뱌토폴크는 자신의 형제들을 제거하고 대공국의 유일한 지배자가 되려고 하였다. 그 와중에 동생들인 보리스와 글레프가 희생되었다. 그들은 충분히 형에 맞서 싸울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악에 대해 악으로 갚지 말고 선으로 갚으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자신들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킬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였던 것이다.
 
=== 관구장주교좌 확립 ===
이렇게 형제들을 죽이면서까지 권력을 차지하고자 했던 스뱌토폴크 역시 1019년에 또 다른 형제인 야로슬라프 공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 야로슬라프 공은 현자로 불리었으며 블라디미르에 이어 루시를 기독교화하는 데에 최선을 다하였다. 1037년 야로슬라프 공은 키예프에 [[성 소피아 대성당성당 (키예프)|성 소피아 성당]] 건립 공사를 명령하였고, 그리스인 관구장주교 테오펨프스토스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로부터 서임되어 키예프에 착좌함으로써 교회행정상 키예프의 성 소피아 대성당은성당은 루시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11세기 말 경에 이르러서 루시는 완전한 기독교 국가가 되어 1051년에는 루시인 성직자 일라리온이 키예프 관구장주교로 서임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대부분의 주교들은 그리스인이었으며 모든 주교품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에 의해 서임되었다. 따라서 키예프 관구장주교는 루시 내 다른 교구의 주교들을 승인할 권리를 갖고 있기는 했으나, 모든 교구를 효과적으로 통제하지는 못하였으며 관구장주교로서의 실제적인 권한도 행사하지 못했다.
 
=== 총대주교좌 성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