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6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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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은 항상 성공하지는 못하였지만 제국의 상업적 번영에 계몽적인 관심을 모이기도 하였으나, [[독일]](현재의 [[빈]])로 돌아간 이후 죽을 때 까지 그의 관심은 제국을 분할하고자 하는 위협에 대응하는 데에 있었다. [[1713년]] 초 카를은 [[1713년 국사조칙|국사조칙]]을 발표하여 상속권을 규제하여 제국의 분할을 막고자 하였다. 카를의 유일한 아들은 [[1716년]] [[4월 13일]]에 태어났으나 유아기에 사망하였고, 이로 인하여 카를의 정책은 그의 딸인 [[마리아 테레지아]]를 상속인으로서 인정받는데 초점이 맞추어졌다.<br />
카를은 이를 이루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하였고 외교적으로도 많은 교섭을 진행하였다. [[:de:Friede von Passarowitz|포자레바츠 조약]]으로 얻었던 영토의 대부분은 그의 별세 1년 전인 1739년에 상실됐는데, 이는 1737년에 참전한 [[:de:Russisch-Österreichischer Türkenkrieg (1736–1739)|제7차 오스트리아-오스만 전쟁]]에서의 패배에 따른 [[:de:Frieden von Belgrad|베오그라드 조약]](1737년 9월 18일)의 결과였다. 카를은 [[1740년]] [[10월 20일]] 사망했고, 이와 동시에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토를 상속받을 더 이상의 남성이 남지 않게 되었다.
== 바깥고리바깥 고리 ==
{{위키공용분류|Charles VI, Holy Roman Emperor}}
* [http://www.aeiou.at/aeiou.encyclop.k/k143492.htm Encyclopedia of Austria: Charles V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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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대공}}
{{헝가리의 군주}}
{{보헤미아의 군주}}
{{1911브리태니커}}
{{Authority contro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