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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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건 ==
*음력 1월 정축(丁丑)일<ref>서기 192년의 정축일은 율리우스력 1월 19일(음력 12월 17일) 및 3월 19일(음력 2월 18일) 등이 있다.</ref>에 후한에서는 크게 사면을 내렸다. [[원술]](袁術)이 보낸 장수 [[손견]](孫堅)이 [[샹양 시|양양]](襄陽)에서 [[유표]](劉表)를 공격하여 손견이 전사하였다. [[원소 (후한)|원소]](袁紹) 및 [[공손찬]](公孫瓚)은 계교(界橋)에서 싸워, 공손찬 군대가 크게 패하였다. ([[계교 전투]])<ref>손견-유표 간의 양양전투 및 손견의 사망시기에 대해서는 이설이 있다. [[손견]] 항목 참조.</ref>
* 음력 1월, 신라에서는 국량(國良)에게 벼슬을 내려 아찬으로 삼고, 술명(述明)을 일길찬으로 삼았다.
*[[5월 22일]]([[음력 4월 23일]], 신사(辛巳)일), [[동탁]](董卓)을 주살(誅殺)하였고 삼족(三族)을 멸하였다. 사도 [[왕윤]](王允)을 녹상서사(錄尚書事)로 삼고 조정을 총괄하게 하였으며 사자 장종(張種)을 보내 산동(山東)을 위무하였다.
* 음력 4월, [[청주 (중국)|청주]](青州)의 [[황건적]]이 [[동평국|동평]](東平)에서 [[연주 (중국)|연주]](兗州) [[자사 (관직)|자사]](刺史) [[유대 (후한)|유대]](劉岱)를 공격하여 죽였다. [[:w:동군|동군]](東郡) 태수(太守) 조조(曹操)가 수장([[:w:zh:壽張縣|壽張]])에서 황건적을 크게 무찔러 항복을 받아냈다. 신라의 수도에 눈이 왔는데, 깊이가 3척에 달했다.
*[[6월 7일]] ([[음력 5월 10일]], 정유(丁酉)일) 후한, 크게 사면을 내렸다.
* [[6월 17일]](음력 5월 20일, 정미(丁未)일), 정서장군([[:zh:征西大將軍|征西將軍]]) [[황보숭]](皇甫嵩)이 [[거기장군]](車騎將軍)이 되었다.
* [[음력 5월]], 동탁의 부곡(部曲)<ref>부곡(部曲)은 후한 말에 지방의 치안을 위해 장군(將軍)이나 호족이 거느리도록 인정했던 군부대 또는 그들의 집단을 말한다.</ref> 장수 [[이각 (후한)|이각]](李傕)·[[곽사]](郭汜)·[[번조]](樊稠)·[[장제 (후한)|장제]](張濟) 등이 반동을 일으켜 수도를 공격하였다. 신라에서는 크게 물난리가 나서 산이 무너진 곳이 10여 곳이었다.
* [[6월 28일]](음력 6월 1일 무오(戊午)일), 장안성(長安城)을 함락하였고, 태상(太常) 종불([[:w:zh:種拂|種拂]])·태복(太僕) 노욱(魯旭)·[[:w:대홍려|대홍려]](大鴻臚) 주환(周奐)·성문교위(城門校尉) [[:w:최열 (후한)|최열]](崔烈)·월기교위(越騎校尉) 왕기(王頎)가 모두 전사하고, 관리와 백성 중에 죽은 자가 수만여명이었다. 이각 등은 모두 스스로 장군(將軍)이 되었다.
== 탄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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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범엽]], 《[[후한서]]》(5세기), 〈[[:s:zh:後漢書/卷9|제9권]] 효헌제기(孝獻帝紀)〉
* [[김부식]] (1145), 《[[삼국사기]]》 〈[[:s:삼국사기/권02 |권2]]〉 벌휴 이사금 조(條)
==각주==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