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마르 (조지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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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마르는 국제 무대에서 조지아의 위치를 확고히 하고 [[중동]]의 그리스도교의 보호국이었던 비잔티움 국왕의 전통적인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십자군이 아이유브조 [[이집트의 술탄|술탄]] [[살라흐 앗딘|살라딘]]과 대립하고 비잔티움 제국이 쇠퇴하는 국면을 이용한 듯 하다.<ref name="Pahlitzsch-38-39">Pahlitzsch, Johannes, "Georgians and Greeks in Jerusalem (1099-1310)", in Ciggaar & Herman (1996), pp. 38–39.</ref><ref name="Eastmond 1998, p. 96">Eastmond (1998), p. 96.</ref> 조지아의 그리스토교 선교사들은 [[남캅카스]]에서 활동했고 국외의 자국인 수도원 공동체들은 [[지중해]] 동부 전역에 산재해 있었다. 타마르의 공식 연대기에서는 [[이집트]]에서 [[불가리아]]와 [[키프로스]]까지의 그녀의 그리스도교에 대한 전체적인 보호, 그리고 교회들과 수도원들에 대한 후원 활동을 찬양한다.<ref name="Eastmond-122-123">Eastmond (1998), pp. 122–123.</ref>
 
조지아 왕실은 먼저 [[성지]]에 있는 조지아의 수도원 중심지들의 보호에 대해 관심을 기울렸다. 12세기 경에는, 여덟 수도원들이 [[예루살렘|제루살렘]]에 있었다.<ref>Eastmond (1998), p. 122.</ref> 살라딘의 전기 작가 [[바하 아드-딘 이븐 샤드다드]]의 보고에 따르면, 1187년에 아이유브조가 예루살렘을 정복한 후에, 타마르가 술탄에게 외교 사절을 보내 예루살렘에 있는 그들이 몰수한 조지아의 수도원들의 소유지들을 반환할 것을 요구했다. 살라딘의 대꾸는 없었지만, 여왕으의 노력은 성공을 거두어 갔다. 타마르가 죽은 후에 단기간의 [[아크레의 주교]]로 있는 [[자쿠에스 데 비트리]]는 예루살렘에서의 조지아의 존재에 대하여 더 나은 근거를 제시했다. 그는 다른 그리스도교 순례자들과는 대조되게 조지아인들은 그들의 깃발을 휘날리며 도시로의 자유로운 왕래가 허용되었었다고 기술했다. 더군다나 이븐 사드다드는 [[하딘 전투|하틴 전투]]에서 약탈한 유물을 가지고 있던 살라딘에게 타마르가 금괴 20만 쪽을 헌납할 만큼 [[진짜 십자가성십자가]]의 유물을 획득하려는 그녀의 노력이 비잔티움 황제를 능가했다고 주장했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허사로 돌아갔다.<ref name="Pahlitzsch-38-39"/><ref name="Eastmond-122-123"/>
 
== 황금 시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