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크스부르크 화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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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카를 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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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
1551년 작센의 모리츠는 카를 5세 황제의 편에 서서 루터파 도시 마그데부르크를 점령하였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황제 편을 떠난 모리츠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와 팔츠 백 및 부르템베르크 공과 손을 잡고 황제를 공격하였다. 모리츠에게 붙잡히는 것을 모면한 황제는 오스트리아로 도망을 쳐야 했다. 1552년 8월 2일 파사우 조약으로 전쟁이 끝났다. 하지만 종교적 문제에 대한 보다 진전된 해결은 3년 뒤인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에서의 제국 회의로 넘겨졌다.
[[슈말칼덴 전쟁]]에서 패배한 프로테스탄트의 망명자들이 작센공 모리츠의 마그데부르크 소탕을 명령했다. 모리츠는 토벌군을 이끌고 황제를 향해 진격하여 이를 격파하고 파사워의 화해를 맺었다. 이 때문에 카를 황제는 퇴위하고 동생인 페르디난드가 대신하여 프로테스탄트 제후와 종교화의를 맺었다. 아우크스부르크의 신앙 고백을 갖는 교회가 인정되고, 군주가 받드는 종파(宗派)에 영민(領民)들은 복종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이주의 자유는 인정되었다. 더욱이 제국의 자유도시에서는 양파의 공존이 인정되었다.<ref name="글로벌_1"/>
카를 황제는 동생인 페르디난드에게 처리권을 넘겼다. 황제 측과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은 종교 화의를 맺었다.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을 가진 루터파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인정되고, 군주가 받드는 종파(宗派)에 영민(領民)들은 복종해야 한다(Cujus regio, ejus religio)는 원칙이 결정되었다. 그러나 지배자의 종교에 따르기를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이주의 자유와 적당한 시가에 따른 재산의 처분는 인정되었다. 제국의 자유도시에서는 양파의 공존이 인정되었다.<ref name="글로벌_1"/>
 
이렇게 루터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일단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고,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교회의 싸움은 끝났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지방 영주제(領主制)의 승리로, 개인에 대한 종교적 관용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ref name="글로벌_1"/>
 
== 각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