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랑카라 시리아 정교회: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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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경쟁 신앙에도 불구하고, 성 토마스의 신앙을 따르던 기독교인들은 16세기에 포르투갈 선교사가 도착할 때까지 신조를 유지했다. 포르투갈인은 교황의 통제 아래 라틴 교회의 계층 구조를 통해 인도 교회를 끌어들이기를 열망했으며, 여러 교구 대표는 포르투갈 식민지 세력이 교황의 권위를 인정하도록 강요받았다.
 
1652년 3월 시리아에서 온 고위 성직자인 아하탈라(Ahatallah)는 현재의 [[첸나이]] 근처에 도착했으며, 포르투갈 식민지 세력에 의한 그의 구금과 고문 소식은 커다란 반역을 불러 왔다. 1653년에 [토마스 대교당]대교당의 지도력하에 나즈 니스는나즈라니스(Nazranis)는 1653년 1월 3일에 코친(Mattchherry, Cochin)에있는에 있는 마탄체리(Mattancherry)의 성모 교회에 모였으며, 쿠넨 십자가 맹세(Coonen Cross Oath)로 알려진 맹세를 했다. 교회 안팎에 있던 촛불이 붙은 양초와 성서를 든 신자들과 교회 안의 주요 사제들은 교회 밖의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밧줄을 만져서 모두 함께 다음과 같은 맹세를 했다.
 
{{인용문|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앞으로 우리는 대주교 프란시스 가르시아와 바울주의자(성 바오로 신학교 고아 출신의 예수회 사제)에게 순종하지 않을 것이며 예수회를 말랑카라 또는 교회에 다시는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