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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벽호여파호'''(呂胡, ? ~ ?) 또는 '''여파호'''(呂破胡)<ref>《한서》 권19 · 권95에서는 여벽호, 권7에서는 여파호라고 한다.</ref>는 [[전한]] 중기의 관료이다.
 
== 행적 ==
[[시원 (전한)|시원]] 원년([[기원전 86년|기원전 86]]), [[수형도위]]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익주]]의 염두(廉頭)와 고증(姑繒)의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장리(長吏)를 죽였다. 또 장가(牂柯) · 담지(談指) 등 24개 현이 이에 동조하니, 그 인원이 3만여 명이었다. 여벽호는여파호는 [[촉군]]을 떠나 [[건위군|건위]]에서 만여 명을 모아 장가를 쳐서 크게 물리쳤다.
 
시원 4년([[기원전 83년|기원전 83]]), 고증 · 섭유(葉榆)에서 다시 반란을 일으키니 여벽호는여파호는 군사를 이끌고 진압에 나섰으나 진군하지 않았다. 오랑캐들은 [[익주군|익주]][[태수]]를 죽이고 기세가 등등하여 여벽호와여파호와 싸웠는데, 싸우다 물에 빠져 죽은 이가 4천여 명이었다.
 
시원 6년([[기원전 81년|기원전 81]]), [[운중군|운중]][[태수]]로 좌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