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멸망: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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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백제 정벌의 원인에는 백제의 쇠퇴에 있었다. 당시 백제 왕 [[의자왕]]은 사치와 항락으로 [[성충]]과 [[흥수]] 같은 유능한 충신들을 귀양보내 죽이는 등 혼란에 빠져 있었다. 이 틈을 노려 신라 태종 무열왕이 군사를 일으켰고 동맹국 당나라도 [[소정방]]에게 13만 명의 대군을 보냈다.
 
==백제 멸망의 불길한 징조==
음력 2월, 백제 사비성의 우물물이 핏빛이었다. 서해 바닷가에서 조그마한 물고기들이 나와 죽었는데 백성들이 이를 다 먹을 수가 없었다. 사비하(泗沘河)의 물의 붉기가 핏빛과 같았다. 음력 4월, 백제에서 두꺼비와 개구리 수만 마리가 나무 위에 모였다. 사비의 저잣사람들이 까닭없이 놀라고 달아났으며, 마치 붙잡으려는 자가 있는 것처럼 쓰러지고 엎어져 죽은 자가 100여 명이었고, 망실한 재물이 헤아릴 수 없었다. 음력 5월, 백제에 바람과 비가 갑자기 닥쳐와, 천왕(天王)·도양(道讓) 두개 사찰의 탑에 번개가 쳤다. 또한, 백석사(白石寺) 강당(講堂)에도 번개가 쳤다. 검은 구름이 마치, 용이 동서로 나뉘어 공중에서 서로 싸우는 것 같았다. 음력 6월, 백제의 왕흥사(王興寺)의 여러 승려들 모두가 어느 배의 노와 같은 것이 큰물을 따라 절 문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야생의 사슴과 같은 모양의 어느 개 한 마리가 서쪽에서부터 사비하(泗沘河)의 언덕에 이르러 왕궁을 향하여 짖더니 잠깐 사이에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사비에서 개떼들이 노상에 모여 혹은 짖고 혹은 울고 하다가 얼마 후에 곧 흩어졌다. 어느 귀신 하나가 궁중에 들어와서, “백제가 망한다, 백제가 망한다.”고 크게 외치고는, 곧 땅속으로 들어갔다. 왕이 이를 괴이히 여겨, 아랫사람을 시켜 땅을 파게 하였다. 깊이 세 자〔尺〕 가량에서 거북이 하나가 있었다. 그 등에 있는 글에 이르기를, “백제는 월륜(月輪)과 같고 신라는 초생달과 같다.”라고 하였다. 왕이 이를 물으니, 무당이 말하기를, “월륜(月輪)과 같다는 것은 가득 찼다는 것입니다. 가득 차면 기울 것입니다. 초생달과 같다는 것은 아직 차지 않은 것입니다. 차지 않으면 점점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라 하였다. 의자왕이 노하여 그를 죽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보름달과 같다는 것은 왕성하다는 것이요, 초생달과 같다는 것은 미약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는 왕성하게 되고 신라는 점차 미약해진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하자, 의자왕이 기뻐하였다.
 
== 백제의 대패 ==
당나라의 고종(高宗)은 신라의 [[태종무열왕]]을 우이도행군총관으로 삼았고, 태종무열왕의 명령 하에, 장군 [[김유신]](金庾信)은 정예 군사 5만 명을 거느리고 [[7월 9일]]([[음력 5월 26일]]) 출발하여, [[7월 30일]]([[음력 6월 18일]]) 지금의 [[이천시|이천 지역]]인 남천정에 모였다. 신라군은 이곳에 대기하였다. 음력 6월, 당나라의 고종(高宗)은 조서를 내려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 [[소정방]](蘇定方)을 신구도행군대총관(神丘道行軍大摠管)으로 삼아,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유백영]](劉伯英), 우무위장군(右武衛將軍) [[풍사귀]](馮士貴),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방효공]](龐孝公)을 거느리고 군사 13만 명을 통솔하게 하였다. 소정방이 군사를 이끌고 성산(城山)으로부터 바다를 건너 백제 서쪽의 덕적도에 이르렀다. [[8월 2일]]([[음력 6월 21일]]) 덕적도(德積島)에서 신라의 태자 [[김법민]]은 신라 제1군 5만 명을 이끌고 당나라 군을 맞이한다. 이때 두 나라 군대는 [[8월 21일]]([[음력 7월 10일]]) 백제 사비성에서 만나기로 약속한다.
 
한편 신라의 군대는 [[7월 9일]]([[음력 5월 26일]]) 출발하여, [[7월 30일]]([[음력 6월 18일]]) 지금의 [[이천시|이천 지역]]인 남천정에 모였다. 신라군은 이곳에 대기한 뒤, [[8월 2일]]([[음력 6월 21일]]) 덕적도(德積島)에서 신라의 태자 [[김법민]]은 신라 제1군 5만 명을 이끌고 당나라 군을 맞이한다. 이때 두 나라 군대는 [[8월 21일]]([[음력 7월 10일]]) 백제 사비성에서 만나기로 약속한다.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 제2군 5만 명은 이천에서 남하한 뒤 탄현을 넘어 진격했다. 그리고 태종 무열왕의 신라 제3군 10만 명의 주력군이 금성을 출발해 [[백화산]]에 진을 쳤다. 그리고 기타 4만 명의 병력 등 총 37만 대군이 백제를 공격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백제는 두 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할 것이라고 생각해 방어 준비를 하지 않는 결정적인 패착을 저지른다. 뒤늦게서야 두 나라의 공격 목표가 백제임을 알게 되었고, 뒤늦게 방비를 서두른다. 즉, 백제의 의자왕은 당나라와 신라의 군사가 움직임을 듣고 여러 신하들을 모아 싸움과 지킴의 마땅함을 물었다. 좌평 [[의직]](義直)이 나아가 말하기를, “당나라 군사는 멀리 아득한 바다를 건너왔으므로 물에 익숙지 못한 자는 배에서 반드시 피곤하였을 것입니다. 그들이 처음으로 육지에 내렸을 때에는 사기가 아직 안정되지 않았을 것이므로, 급히 치면 뜻한 바를 얻을 수 있습니다. 신라 사람은 대국(大國)의 후원을 믿고 있는지라, 우리를 가벼이 여기는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만일 당나라 사람이 날카로움을 잃는 것을 본다면, 반드시 의심하고 두려워할 것이므로, 감히 빠르게 진격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당나라 사람과 결전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생각합니다.”라 하였다. 달솔(達率) [[상영]](常永) 등이 말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당나라 군사는 멀리서 와서 속히 싸우려 할 것이니, 그 예봉(銳鋒)을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신라인들은 전에도 여러 번 아군에게 패배를 당하였으므로, 지금 우리 병사의 위세를 바라보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의 계책은 마땅히 당나라 사람의 길을 막아 그 군사가 쇠약해지기를 기다렸다가, 먼저 절반의 군사로 하여금 신라군을 치게 하여, 그 예기(銳氣)를 꺾은 연후에 그 형편을 엿보아 세력을 합하여 싸우면, 군사를 온전히 하고 나라를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의자왕은 망설이며, 어느 말을 따를 바를 알지 못하였다. 이 때에 좌평 [[흥수]](興首)가 죄를 얻어 고마미지현(古馬彌知縣)에 유배되어 있었다. 사람을 보내 그에게 묻기를, “사태가 위급하니 이를 어찌하는 것이 옳으냐?” 라 하였다. 흥수가 이르기를, “당병은 원래 수가 많고 군율이 엄하고 분명합니다. 더구나 신라와 공모하여 기각(掎角)을 이루니 평원이나 광야에서 마주 보고 진을 친다면 승패를 알 수 없을 것입니다. 백강(白江)과 탄현(炭峴)은 우리 나라의 요로(要路)입니다. 장부(壯夫) 한 사람이 창 한 자루만 가지고도 1만 명이 이를 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마땅히 가려낸 용사가 가서 그것을 지켜, 당병이 백강(白江)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신라인이 탄현(炭峴)을 넘지 못하게 하시고, 대왕께서는 여러 겹으로 막아서 굳게 지키시다가 그들의 재물과 양곡이 다하고 사졸이 지치기를 기다린 연후에 힘을 떨쳐 그들을 치면 반드시 깨뜨릴 것입니다.”라 하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백제는 두 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할 것이라고 생각해 방어 준비를 하지 않는 결정적인 패착을 저지른다. 뒤늦게서야 두 나라의 공격 목표가 백제임을 알게 되었고, 뒤늦게 방비를 서두른다. 의자왕은 좌평 의직에게 2만 명의 결사대를 내주어 백강을 막게 하고 계백 등에게 결사대를 내주어 황산벌을 막게 했다.
 
이 때에 대신들이 흥수의 말을 믿지 않고 말하기를, “흥수는 묶여있은 지 오래이므로 임금을 원망하고 나라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므로 그 말은 쓸 수가 없습니다. 당병이 물결을 따라 백강(白江)으로 들어오게는 하되 배를 나란히 하지 못하게 하고, 신라군이 탄현(炭峴)으로 올라오게는 하되 좁은 길을 따라 말을 나란히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낫습니다. 이 때를 당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친다면, 이는 마치, 새장 안의 닭이나 그물 안의 물고기를 죽이는 것과 같습니다.” 의자왕은 그럴 듯이 여겼다. 또 당과 신라의 병사가 이미 백강과 탄현을 지났다고 들었다. 장군 [[계백]](堦伯)을 보내어 사사(死士) 5천을 거느리고 [[황산벌 전투|황산]](黃山)에 나아가 신라병과 싸우게 하였다. 네 번을 붙어 싸워서 모두 이겼으나 군사가 적고 힘도 꺾여서 끝내는 패하고, [[계백]](堦伯)도 죽었다. 이에 군사를 합쳐 웅진강(熊津江) 입구를 막고, 강 가까이에 군사를 주둔시켰다. 소정방이 왼편 물가에서 나와, 산에 올라가서 진을 쳤다. 그들과 더불어 싸웠으나 백제군이 대패하였다. 왕사(王師)를 실은 배들은 조수를 타고 고물과 뱃머리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아가며 북을 치고 떠들어댔다. 정방(定方)이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곧장 그 도성(都城)으로 달려가서 30리쯤 되는 곳에 머물렀다. 백제 군사의 모든 무리가 이를 막았으나 또 패하여 죽은 자가 1만여 명이었다. 당나라 군사가 승세를 타고 성에 가까워지자, 의자왕은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성충(成忠)의 말을 들어주지 않아 이 지경에 이른 것을 후회한다.” 하였다. 드디어 태자 효(孝)와 함께 북쪽 변경으로 달아났다. 소정방이 사비성을 포위하니 왕의 둘째 아들 태(泰)가 스스로 즉위하여 왕이 되고 무리를 거느리고 굳게 지켰다. 태자의 아들 문사(文思)가 왕자 융(隆)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왕과 태자께서 성밖으로 나가시자, 숙부가 멋대로 왕이 되었습니다. 만약 당나라 군사가 포위를 풀고 가버리면, 우리들이 어찌 안전할 수 있겠습니까?”하였다. 그들은 마침내 좌우를 거느리고 밧줄에 매달려 성밖으로 나갔다. 백성들이 모두 그들을 따라 가니 태(泰)는 붙들 수 없었다. 정방이 병사로 하여금 성가퀴를 넘어가 당나라 깃발을 세우게 하였다.
<!--위 내용과 아래 내용을 융화시켜야 함.-->
의자왕은 좌평 의직에게 2만 명의 결사대를 내주어 백강을 막게 하였다.
 
당나라 군대는 백강에서 의직의 백제군을 격파하고 먼저 사비성에 이르렀다. 그러나 [[8월 20일]]([[음력 7월 9일]]) 신라군이 황산벌에 도착했을 때, 백제군은 이미 황산부근(탑정호 저수지 위치)3곳에 진영을 두고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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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삼국 통일]]
 
==참고 문헌==
== 바깥 고리 ==
* [[김부식]] (1145), 《[[삼국사기]]》 〈[[:s:삼국사기/권28|권28 백제본기 제육(百濟本紀第六) 의자왕]](위키문헌 번역본)〉 /[http://db.history.go.kr/item/level.do?levelId=sg_028r_0020 (국사편찬위원회 > 한국사데이타베이스 번역본) ]
* [http://kids.hankooki.com/lpage/edu/200711/kd2007112013321677370.htm <nowiki>[해양 강국 백제를 찾아서]</nowiki> 계백의 5000 결사대 황산벌서 '최후의 전투'], 《소년한국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