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열 (후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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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방에서 명성을 떨쳤으며, 태수를 역임하고 구경(九卿)의 반열에 올랐다.
 
[[후한 영제|영제]](靈帝) 때 홍도문(鴻都門)을 열어 관직을 팔았다. 부유한 자는 먼저 돈을 냈고 가난한 자는 관직을 받은 후 돈을 배로 갚았으며, 혹자는 심부름꾼이나 보모로 하여금 돈을 보내도록 하였다. 이때 [[단경 (후한)|단경]](段熲) · [[번릉]](樊陵) · [[장온 (후한)|장온]](張溫) 등은 비록 공적과 명예가 있었으나, 모두 재물로써 관직을 사들인 것이었다. 최열 또한 보모를 통해 오백만 금을 들여 사도(司徒)가 되었다.([[185년]] 음력 3월)
 
최열은 태위(太尉) 등의 요직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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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탁이 [[왕윤]](王允) · [[여포]](呂布)에게 살해당한 후, 그 잔당이 봉기하였다. 최열은 이때 성문교위(城門校尉)로서 [[장안]](長安)을 지키고 있었는데, [[이각 (후한)|이각]](李傕) 등이 장안을 점거하여 왕윤 등과 함께 살해당하였다.
 
== 참고 문헌 ==
* [[범엽]](5세기), 《[[후한서]]》 〈[[:s:zh:後漢書/卷8|제8권]]〉
== 각주 ==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