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 퀴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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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 = Marie Curie Signature.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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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스크워도프스카 퀴리'''({{llang|pl|Maria Skłodowska-Curie}}, [[폴란드]] [[바르샤바]], [[1867년]] [[11월 7일]] ~ [[1934년]] [[7월 4일]])는 [[폴란드]] 출신의 [[프랑스]] 과학자이다과학자. 본명은 '''마리아 살로메아 스크워도프스카'''({{llang|pl|Maria Salomea Skłodowska}})이고, 프랑스식 이름은 '''마리 퀴리'''({{llang|fr|Marie Curie}})이다.
 
[[방사능]] 분야의 선구자이며 [[노벨상]]여성 수상자이다.최초로 여성노벨상을 최초의수상했다. 노벨상유일하게 수상자로,노벨 물리학상과 화학상을 동시에 받은 유일한 인물이다.받고 [[라이너스 폴링]]과 함께 노벨상 2관왕에2관왕, 등극한최다 인물로수상자로 유명하다등극했다.
 
== 생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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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학 생활 ===
여학교를 졸업한 마리는 남학생만 뽑는 [[바르샤바 대학교]]와는폴란드와는 달리, [[성 차별]]이 없는 [[프랑스]]에서 공부하고 싶어했으나 학비가 없었기 때문에, 3년간 시골의 부유한 농가의 [[가정교사]]로 직접고용되어고용되어 사용자의 딸과 아들을 가르쳤으며, 나중에는 러시아의 식민지배를 받는 폴란드 민족문제를 고민하던 사용자의 허락을 받아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야학을 운영했다.
 
다행히 아버지가 소년감화원 사감으로 취직하여 경제적 여유가 생기자, 마리는 둘째 언니 브로니스와바와 형부 카지미에시 드우스키(Kazimierz Dłuski) 부부가 [[의사]]로 일하고 있던 [[프랑스]] 파리에서 유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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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Pierre and Marie Curie.jpg|thumb|225px|[[피에르 퀴리]]와 마리 퀴리, 파리의 연구실에서, 1907년 이전]]
 
여성으로서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이며, 물리학상과 화학상을 동시에 받은 유일한 인물이다. 노벨상을 2회 수상한 기록은 [[라이너스 폴링]]과 함께 인물로서는단체 아닌 개인로서는 최다 기록이다.<ref>단체로서 적십자 국제위원회가 3회 수상하였다.</ref>
 
[[1903년]] [[라듐]] 연구로 마리 퀴리와 남편 [[피에르 퀴리]]가 공동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였고, [[1907년]]에는 라듐 원자량의 정밀한 측정에 성공하였다. [[1910년]]에는 금속 라듐의 분리도 하여, [[1911년]]에는 라듐 및 [[폴로늄]]의 발견과 라듐의 성질 및 그 화합물 연구로 마리 퀴리 단독으로 [[노벨 화학상]]을 수상하였다. 그 공적을 기려 [[방사능]] 단위에 [[퀴리]]라는 이름이, [[화학 원소]] [[퀴륨]]에 이름이 사용되었다. 마리 퀴리의 딸 부부인 [[이렌 졸리오퀴리]]와 [[프레데리크 졸리오퀴리]]도 노벨 화학상화학상을 수상자들이다수상했다.
 
프랑스 보수성과 여성 성차별 문제로 아카데미 회원이 되지 못했다.
프랑스의 보수성, 가십을 좋아하는 언론의 공세<ref>'남편의 애제자 폴 랑주뱅과 연애관계이다'라는 기사가 났음.</ref>, 폴란드 출신이라는 점, 그리고 여성이라는 성차별적 문제로 결국 화학 아카데미 회원이 되지 못했다.
 
== 수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