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언 (삼국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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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삼국지 쪽이 옳습니다. 만약 '치검'이라면 손자 극정도 '치정'이 되어야 하거든요. 이래서 제가 범엽을 싫어합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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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자 세력 구축 ===
당시 익주는 전임 자사 극검(郤儉)<ref>《후한서》 영제기와 유언전에서는 치검(郗儉)이라 하였으나 《삼국지》 유언전과 《자치통감》을 따른다.</ref>의 실정으로 마상(馬相), 조지(趙祗) 등이 스스로 [[황건적]]이라 칭하며 [[광한군]] 면죽현(綿竹縣)을 중심으로 들고일어나 광한군, [[촉군]], [[건위군]], [[파군 (행정 구역)|파군]]을 휩쓸던 것을 익주종사(―從事) [[가룡]]이 막 평정한 터였다. 가룡을 교위(校尉)로 삼고 주도는 면죽으로 정해 관대하게 위무에 힘쓰며 민심을 모아 슬슬 독자 세력을 꾀하였다.
 
남양과 [[삼보]] 등지에서 유입된 수만 가를 친위 세력화하여 동주병(東州兵) 내지 동주사(東州士)라 불렀다.<ref name='민법 제1060조'>[[상거]], 《[[화양국지]]》5권 [[공손술]]유이목지</ref> [[장로 (후한)|장로]]는 독의사마(督義司馬)에 임명했는데 그 [[어머니]]가 동안이면서 귀도(鬼道)를 일으켜 유언의 [[집]]에 자주 드나들었다. 장로는 별부사마(別部―) 장수(張脩)와 함께 병력을 끌고 가 [[한중군|한중]]태수 소고(蘇固)를 습격해 죽이고 야곡(斜谷)을 차단했으며 장수까지 [[살해]]해 그 무리를 흡수하였다. 유언은 [[오두미도|미적]](米賊)이 [[길]]을 막아 통하지 못하게 됐다고 상서하는 한편 유력 [[호족]]인 파군태수<ref name='민법 제1060조' /> 왕함(王咸), 임공[[현령|현장]](臨邛縣長)<ref>《익부기구잡기》(益部耆舊雜記) ; 배송지 주석, 《삼국지》31권 촉서 제1 유언에서 인용</ref> 이권(李權) 등 십여 명을 숙청해 익주에서의 입지를 공고히 하였다. [[191년]]([[초평]] 2년) 이에 반발해 [[무기]]를 든 가룡과 건위태수 임기(任岐)도 진압하고 그 [[목숨]]을 빼앗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