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공방전: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편집 요약 없음
67번째 줄:
히틀러는 할더의 계획에 매우 실망하였고, 독일군이 연합군이 예상하지 못한 기습을 통해 승리를 거둘 수 있다는 희망에 빠른 공격 준비를 결정하였다. 하지만 독일군의 열악한 상태를 알고 있었던 독일군 장교들은 공격 시점을 최대한 늦추고자 날씨를 구실로 히틀러를 설득했다. 또한 히틀러는 명확하게 그것을 향상시킬 수 있는지 이해하지도 못하고 불만족스럽게 계획을 변경했다. 중앙 벨기에의 주공 외에 조공을 남쪽으로 예측했으며 이것은 노력의 분산 결과였다. 히틀러는 11월 1일에 같은 제안을 했다.<ref>Frieser 2005, p. 62.</ref> 10월 29일, 할더의 두 번째 계획인 작전 지시령 2호, 황색 상황({{llang|de|Aufmarschanweisung N°2}})은 네덜란드의 조공이 특징으로 이러한 공격 변경 내용을 반영했다.<ref name=Shirer718>Shirer 1990, p.718</ref>
 
히틀러는 이 할더의 계획을 역시 싫어했다. 또, [[A 집단군]]의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도 이 계획에 반대했다. 히틀러와 달리, 폰 룬트슈테트는 직업 군인으로써 출동 허가 방식을 완벽하게 잘 이해하고 있었다. 이 것의이것의 근본적인 결함은 19세기 이후 독일의 작전의 기초인 [[기동전]]의 원칙을 지키지 않아서였다. 이 계획은 연합군 본군의 에워쌈과 파괴를 초래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했었다. 이것을 달성하기 위한 A 집단군의 폰 장군의 위치는 [[스당]]이었다. 10월 21일, 폰의 출동 허가를 참모총장, 중장 [[에리히 폰 만슈타인]]의 대안 계획은, 육군 그룹을 가능한 강하게 만들고 A 집단군을 [[B 집단군]]보다 북쪽으로 배치하여야 한다는 의견이었다.<ref>Frieser 2005, p. 63.</ref>
 
=== 만슈타인의 계획 ===
95번째 줄:
'기습'의 개념을 다루기 위해서는 복잡하게 설명해야 한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볼 전략에 대한 명시적인 참조가 없어, 작전이나 독일군 전술을 정확히 알 수 없다. 독일 군사는 예술의 증거가 없고, 전략이나 산업 준비는 '전격전' 경향 밖으로 벗어난다.<ref>Tooze 2002, p. 372.</ref><ref>Overy 1995, p. 207.</ref> 독일 제국은 파멸로 이끄는 긴 전쟁이 아닌 신속한 전쟁 책략을 준비했다. 히틀러의 계산 착오로, 산업 시설 및 인프라가 전쟁을 준비되기 전인 1939년에 시작되고, 이러한 상황에서 참모 총장은 빨리 전쟁을 승리하기 위한 시도로 원하는 의도가 아니었지만 연합군의 경제적, 물질적 우월성에 변화를 가질 수 있었다.<ref>Frieser 2005, p. 26.</ref> 독일 군사가 유럽에서 야심을 달성하기 위한 '전격전' 전략은 1940년 프랑스 패배 이후 추구하기 시작했다. 독일의 역사가 칼-하인츠 프레서의 말은 다음과 같다.
 
<blockquote>"서부 전역의 정복은 의도된 것이 아니었다. 대신, 그것은 절망적인 전략적 상황을 벗어날 절망의 작전이었다. 서부 전역 후까지도 '전격전의 사고는 개발하지 않았다'(저자의 강조). 이 것은이것은 원인이 아닌 오히려 승리의 결과였다. 1940년 5월에 누구나 놀랍게 성공적으로 포위햐야 하며, 비밀적인 성공의 형태로 히틀러의 정복 비전을 구현한 것은 이때였다.<ref>Frieser 2005, p. 349–350.</ref></blockquote>
 
== 연합군의 전략 ==
132번째 줄:
 
=== 육군 작전의 전개 ===
독일 육군은 세 개의 집단군으로 나뉘었다.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지휘하의 육군 A 집단군은, 7개의 기갑 사단을 포함하여 45와 ½개의 사단을 지휘하고, [[만프레드 셀스치데드]](정식 명칭은 아니나, [[윈스턴 처칠]]이 사건 이후 독일어를 영어로 번역)를 끊는 결정적인 집단군<ref>Frieser 1995, p. 71.</ref> 이며 낫질작전에서 심지어는 앞부분의 낫질을 연합군의 [[아르덴 방어]]에서 돌파 하기도 한다. 이 것은이것은 [[4 군 (독일 국방군)|4 군]], [[제12군 (독일 국방군)|12 군]], [[16 군 (독일 국방군)|16 군]] 등 3개로 나뉘었다. 4 군은 XV 기갑 군단 하나를 배치하였으나, 다른 두개 기갑군단인 XXXXI 기갑 군단(라인 하르트)와 XIX 기갑 군단 (구데리안) 등 두개의 기갑 군단은 XIV 보병 군단과 연결했다. 그리고, [[클라이스트 기갑군단]](공식적으로는 XXII 기갑 군단)은 특별 독립적으로 운영되었다.<ref>Frieser 2005, p. 101.</ref>
 
[[페도르 폰 보크]] 지휘하의 육군 B 집단군은, 29와 ½개의 사단을 지휘하여 저지대 국가로 진격하여 연합군의 북부군을 공격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 것은이것은 [[6 군 (독일 국방군)|6 군]]과 [[18 군 (독일 국방군)|18 군]]으로 구성되었다. [[빌헬름 리터 폰 레프]] 지휘하의 육군 C 집단군은, 18개 사단으로 구성되어 연합군의 동부 공격을 막는 역할을 하며 [[마지노 선]]과 [[라인 강]]의 상부 공세를 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 것은이것은 1 군과 7 군으로 나뉘어 있었다.<ref>Dear and Foot 2005, p. 323.</ref>
 
=== 통신 ===
174번째 줄:
처음에는 [[7 군 (프랑스)|7 군]]이 해안 좌측 근처에 위치했으며, 경기갑 사령부({{llang|fr|Division Légère Mécanisée}}, DLM)이 앤트워프를 통해 네덜란드로 이동하고자 했다. 남쪽의 다른 군은 [[영국 원정군 (제2차 세계 대전)|영국 원정군]] (BEF)으로 딜 선으로 진출하여 벨기에 군 오른편에서 [[루뱅]]에서 [[우아브르]]로 진군하고자 했다. [[1 군 (프랑스)|1 군]]은 두 개의 경기갑 사단과 예비 기갑 사단(DCR)로, 장블루 간격인 [[우아브르]]부터 [[나뮈르]]까지의 방어를 맡았다. 벨기에의 최남단에 위치한 [[9 군 (프랑스)|9 군]]은 나무르-[[스당]] 방어를 맡았다.
 
[[2 군 (프랑스)|2 군]]은 진군의 "경첩"을 형성하며 입지를 굳히기로 하였다.<ref>Frieser 2005, (No page number. Based on map entitled ''Deutscher und alliierter Operations Plan Mai 1940'' between pp. 130-131.</ref> 이 것은이것은, 스당에서 엘리트 독일 기갑 사단과 전투를 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인력에 낮은 순위를 두며, 대전차 무기와 항공 지원으로 5개 사단이 구성되어 있었다. 이 중 2개 사단은 나이가 넘은 사람들 또는 세리에 B 사단이었으며, 한 사단은 [[북아프리카]]의 [[세네갈]] 사단이었다.<ref>Citino 2005, p. 284.</ref> 그 사단들은 담당 가능한 전선보다 더 넓은 전선을 담당했으며, 그리하여 훈련과 장비를 고려하지만 프랑스 방위 시스템의 맹점으로 남게 되었다. 이것은 아르덴 숲까지 탱크가 진군하기까지의 복잡한 통로를 생각한 프랑스 최고 사령관의 믿음으로, 벨기에군의 정보력으로 기갑 사단이 아르덴을 넘을 것을 경고했지만 독일군의 진군 경우 교통 체증을 이유로 믿지 않았다. 이 문제에 대해 자신의 신념으로 프랑스 최고 사령부는 이것이 중요한 문제임을 거부했다.
 
=== 공군 ===
307번째 줄:
같은 시간 동안, B 집단군의 보크 장군은 대부분의 항공 지원과 사단을 빼앗겼다. A 집단군에게 10개 기갑 사단을 포함하여 70개 사단을 운용하는 동안, B 집단군은 21개 사단으로 줄었다.<ref>Bond 1990, pp. 100–101.</ref> B 집단군은 A 집단군의 "모루"에 대한 "망치"로 이용하는 것이었다. 할더는 나중에 히틀러가 플랑드르 땅이 아닌 프랑스에서 결정적인 전투가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ref>Bond 1990, p. 103.</ref>
 
[[헤르만 괴링]]은 "독일 공군"이 폰 룬트슈텐트와 히틀러에게 모든 피난을 막으며 기갑 시간의 재정비 시간을 늘릴 것이라고 확신했다.<ref>Kershaw 2008, p. 27.</ref> 이 독일 공군의 지연으로 피난에 필요한 3일(5월 24일-27일)을 연합군에게 벌어주고 주요 피난 항구인 됭케르크의 방어 시간을 벌게 해주었다.<ref name="Healy 2007, p. 81"/> 이 것은이것은 히틀러, 룬트슈텐트와 괴링 모두의 책임으로 본다.<ref>Bond 1990, p. 104.</ref>
 
==== 칼레 전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