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오카 아시아 영화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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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
'''후쿠오카아시아영화제'''를 이끌고 있는 [https://ja.wikipedia.org/wiki/前田秀一郎 前田秀一郎(마에다 슈우이치로)]는 영화평론가로 1976년부터 후쿠오카에서 후쿠오카에 소개되지 않은 독립프로덕션 일본영화을 영화관을 빌려서 상영했고, 이후 일본 영화뿐만 아니라 외국 독립영화로 확대했다. 1987년부터 매년 여름 후쿠오카아시아영화제를 개최하고 있다.

후쿠오카아시아영화제 홈페이지(일본어)<ref>{{인용|title=후쿠오카 아시아 영화제 홈페이지|url=http://asianfilm.tank.jp/?page_id=14}}</ref>에 따르면 이 영화제는 이마무라 쇼헤이([https://ja.wikipedia.org/wiki/今村昌平 今村昌平]) 감독이 '본인의 영화《여현(女衒)》(1987년 개봉)<ref>{{인용|title=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영화 여현(女衒)|url=http://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32378}}</ref>의 말레이시아 로케이션 중 우천으로 촬영이 중단되었을 때 관람한 현지 영화가 재미있었다'는 말이 힌트가 되어 시작되었다.

당시 아시아 영화를 테마로 한 영화제는 일본에 없었기 때문에 이마무라 감독에게 종합 프로듀서를 부탁하고 영화제에 상영할 작품을 모으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에서 아시아 영화의 수는 극히 적었다. 20년전에는20년 전에는 아시아 영화의 대부분이 비디오나 레이저 디스크로 나와 있지 않아서 무거운 35mm 필름을 배송받아서 홀을 빌려서 상영했다. 중국영화는 1977년에 시작한 중국영화제의 작품이 일본에서 배급되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작품을 볼 수 있었다. 그 밖에 한국, 홍콩, 인도, 스리랑카, 필리핀 그리고 일본의 신작을 넣어 총 16편을 상영했다. 그때는 기존에 개최되는 여러 영화제의 하나라는 인식만 있었다. 그래서 제1회라는 타이틀도 붙이지 않았다. 그런데 기조강연을 한 종합 프로듀서 이마무라 감독이 돌아갈 때 "이런 의미가 있는 영화제는 일본 어디를 찾아봐도 없다. 매년 개최해야 한다. 나도 동경에서 응원할테니, 반드시 매년 개최하시라"고 말했다. 그래서 이 영화제는 매년 개최하게 되었다. 그 2년 전인 1985년 시작한 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 히로시마(広島, Hiroshima) 대회는 2년에 1번 개최였다. 같은 해 가을에 시작한 동경국제영화제도 2년에 1번 개최였다(1991년부터 매년 개최).
 
== 출품 규모 및 한국영화 수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