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애왕: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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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연도 ===
현존하는 역사서에는 민애왕의 출생연도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대구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에서 발견된 [[전 대구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 납석사리호|민애대왕석탑사리호]](敏哀大王石塔舍利壺, <small>[[대한민국의 보물 (제701호 ~ 제800호)|보물]] 제741호, [[동국대학교 박물관|동국대학교박물관]] 소장</small>)에 새겨진 기록에 의하면 23세에 사망하였다. 민애대왕석탑사리호는 [[863년]](경문왕 3년) [[경문왕]]이 민애왕의 명복을 기원하며 제작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setId=-1&prevPage=0&prevLimit=&itemId=gskh&types=&synonym=off&chinessChar=on&levelId=gskh_010_0050_0100_0040&position=-1|제목=한국고대금석문자료집 〈민애대왕석탑사리합기(閔哀王石塔 舍利盒記)〉|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확인날짜=}}</ref> <blockquote><small>國王奉爲 敏哀大王追崇 福業造石塔記 (중략) 伏以 敏哀大王諱肌 宣康大王之長子 今上之老舅 以開成己未之年太蔟之月下旬有三日 奄弃蒼生春秋二十三 葬▨星霜二紀▨▨▨▨▨惠▨▨▨▨▨至欲崇蓮坮之業於▨桐藪願堂之前創立石塔 (중략) 時咸通四年歲在癸未無射月十日記 (중략)</small></blockquote><blockquote><small>국왕은 삼가 민애대왕을 위하여 복업을 추숭하고자 석탑을 조성하고 기록한다. ··· (중략) 엎드려 생각컨대 민애대왕의 휘는 肌이며</small><ref group="주">경문왕의 아버지인 계명(啓明)의 '명(明)'자를 피휘(避諱)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출전 : 동화사적비명병서(桐華寺跡碑銘幷序), 『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Ⅲ(1992) - 김남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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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5년]](흥덕왕 10년) 2월 [[김균정]](金均貞)이 [[상대등]]으로 취임하고 그의 아들 [[신무왕|김우징]](金祐徵, <sup>제45대 신무왕</sup>)이 시중에서 물러나면서, 당시 대아찬이었던 김명(金明, <sup>민애왕</sup>)이 시중에 임명 되었다. [[흥덕왕]]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붕어하자, 김균정과 그의 조카 [[희강왕|김제륭]](金悌隆, <sup>제43대 희강왕</sup>) 사이에 왕위 계승을 둘러싼 내란이 발생하였다.<ref>《[[동국통감]]》 권11 신라기(東國通鑑&nbsp;卷11&nbsp;新羅紀)</ref> 민애왕의 누이 2명이 각각 김균정과 김제륭과 혼인하였으므로 민애왕에게는 김균정과 김제륭이 모두 매형이 된다.<ref group="주">희강왕(김제륭)비 문목부인, 김균정의 아내인 조명부인, 민애왕은 모두 충공의 자식들로 남매이다.</ref>
 
[[836년]] 아찬 [[이홍 (신라)|이홍]](利弘), 아찬 배훤백(裴萱伯) 등과 함께 제륭을 지지하여 왕으로 옹립하였다.
 
[[837년]](희강왕 2년) 봄 정월, [[상대등]]에 임명되었다,
 
[[838년]](희강왕 3년) 봄 정월, 시중 이홍(利弘) 등과 반란을 일으켜 희강왕의 측근들을 죽이고 왕을 핍박하여 궁중에서 목을 매어 자살하게 하고 왕위에 올랐다.<ref name=":1">《[[삼국사기]]》 제10권 신라본기 제10(三國史記 卷第十 新羅本紀 第十)</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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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8년]] 이찬 김귀(金貴)를 상대등으로 삼고, 아찬 헌숭(憲崇)을 시중으로 삼았다. 2월, [[신무왕|김우징]]이 [[청해진]]으로 들어가 [[장보고]]에게 의탁하며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병사를 요청하여군사를 지원받았다. 겨울 12월, 이 중 [[김양 (신라)|김양]](金陽)이 평동장군이 되어 군대를 거느리고 무주(武州) 철야현(鐵冶縣)에 도착하였다. 왕은 대감 김민주(金敏周)에게 군사를 내어 맞아 싸우게 하였다. 김양이 낙금과 이순행을 시켜 기마병 3천으로 돌격하게 하였는데, 적을 거의 모두 살상하였다.
 
[[839년]](민애왕 2년) 봄 윤 정월, 김양의 군사가 밤낮으로 행군하여 19일에 달벌(達伐, 대구)의 언덕에 당도하였다. 왕은 김양의 군사가 도달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이찬 대흔(大昕)과 대아찬 윤린(允璘)ㆍ의훈(嶷勛) 등에게 병사를 거느리고 그들을 막도록 하였다. 김양의 군사가 또 한 차례 싸움에 크게 이겨서, 왕의 군사 중에는 죽은 자가 절반이 넘었다. 이때 왕이 서쪽 교외의 큰 나무 밑에 있었는데, 측근들이 모두 흩어지고 혼자 서서 어찌 할 바를 모르다가 월유택(月遊宅) 안으로 도망하였으나, 병사들이 찾아내어 죽였다. 여러 신하들이 예를 갖추어 장사 지내고, 시호를 '''민애(閔哀)'''라 하였다.<ref name=":1" />
 
민애왕의 사망 날짜와 관련하여 《[[삼국유사]]》 왕력(王歷)에는 1월 22일, [[전 대구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 납석사리호|민애대왕석탑사리호]](敏哀大王石塔舍利壺)의 명문에는 1월 23일에 사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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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역대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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