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왜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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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왜구 구성원 대부분은 밀무역을 하는 중국인들이었다고 한다. 《[[명사]]》 일본전에서는 왜구들 중 일본인은 3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 시기 명나라는 [[해금 정책]]을 실시하며 사무역을 계속 제한했기에, 밀무역에 나서고자 하는 중국인들이 일본인의 모습을 흉내내고 절강성, 복건성 남부의 월항을 거점으로 왜구 노릇을 했는데 이들을 가왜(假倭)라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가정제 시기 왜구 발생 회수는 601차례에 이르렀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명나라 내부 관료 중에서도 해금정책을 완화하여 사태를 타개하고자 하는 이들이 생겼는데, 그 중 한 사람인 [[호종헌]]이 중국계 왜구 두목 [[왕직]]을 회유한 뒤 처형했다. 지도자를 잃자 왜구 세력이 약화되었고, 뒤이어 [[척계광]]이 왜구 토벌에 성공하면서 후기 왜구의 세력은 약화되었다. 이후 명나라는 해금을 완화하여 동남아 국가 및 [[포르투갈]]과의 무역을 인정했다. 하지만 왜구로 인해 일본을 불신하여 일본과의 무역은 계속 인정하지 않았기에 158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해적정지령]]을 내릴 때까지 왜구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토막글|일본사}}
 
[[분류:왜구]]
[[분류:16세기 분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