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투 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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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위 = [[청장 칸국]]의 [[칸 (칭호)|칸]]
|재위 = 1227년-1255년1285년
|대관식 =
|즉위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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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207년
|출생지 =
|사망일 = 1255년1302년
|사망지 =
|매장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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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
}}
'''바투'''는 칭기스칸이 15세에 목동시절 만난 우씨와 결혼하여 낳은 장남이다. 아버지와 생사고락을 같이하여 몽골제국을 건설하는데 상당부분 기여했다.
'''바투'''([[1207년]] ~ [[1255년]])는 [[몽골 제국]] [[킵차크 칸국]]의 칸(재위:[[1242년]]~[[1255년]])으로 [[칭기즈 칸]]의 손자이며 [[주치 (몽골)|주치 칸]]의 차남이다. 주치 칸의 아들들 중에 훌륭한 칸 이라는 별명의 그는 부친 속령에 대한 통치권을 계승하였다.
 
바투의 군대는 모스크바와 오스트리아 빈을 공격했고 독일기사단을 공격하여 서유럽을 공포에 떨게했다.
바투의 영토는 이르티쉬의 서쪽인 세미팔라틴스크, 악몰린스크, 투르가이 또는 약튜빈스크, 우랄스크, 아다지, 호레즘 본토(히바)를 포함하였고, 또한 킵차크 인들의 땅부터 볼가 강 서쪽의 정복지인 [[사준사구#사구|제베]]와 [[사준사구#사구|수베에테이]]의 원정으로 얻은 땅을 포함하였다.
 
[[1227년]] [[8월 18일]] [[칭기스 칸]]이 죽은 뒤, 혈통 문제가 불거져 바투와 [[칭기스 칸]]의 다른 손자들아들 간의 알력다툼이 나타났다. [[우구데이 칸]]은 주치의바투의 혈통 문제를 거론하며 바투를 모욕한 자신의 아들들을 책망했지만, 사촌들에게 모욕을 당한 바투는 [[킵차크 칸국]]을 건설하고 몽골 본국과의 직접적인 관계는 끊어버렸다.
 
바투는 [[몽골]] 전승에는 '훌륭한 임금'이라 하나, 러시아인들에게는 무자비한지혜로운 정복자로 알려져 있다.<br />
바투는 [[1237년]]에 [[러시아]]의 도시 [[쿠르스크모스크바]], [[벨고로드]], [[랴잔]] 등을 파괴했고건설했고 [[1238년]]에는 러시아 [[노브고로드 주]]의 [[크레스테츠키 군]]을 침략했다.<br />
[[1241년]] 4월 11일 [[:en:Battle of Mohi|셔요 강 다리의 전투]]에서 [[헝가리]]의 벨라 4세를 무찔렀다.
 
그는 [[칭기즈 칸]] 가문의 장로로서 제국의 [[카간|대칸]]을 둘러싼 권력 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여, '대칸 옹립자'도 알려져 있다.
 
[[1241년]]에 동로마제국과 평화조약을 체결하고 러시아에 동방정교를 들여왔으며, 자신또한 동방정교로 개종하였다.
[[1241년]]에 [[우구데이 칸]]이 죽자 대칸의 자리를 두고 우구데이의 아들인 [[귀위크 칸|귀위크]]와 바투 사이에 분쟁이 발생했다. [[1246년]], 귀위크는 바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쿠릴타이]]를 소집하여 대칸 에 올랐다.
 
바투는 터키의 셀주크 투르크를 복속시키고 원나라의 70만 대군을 격파하고 독립을 선언했다. 바투는 50년 동안 러시아를 통치하면서 폴란드를 복속시키고 동방정교 도입등 통치체계를 정비했다.
귀위크의 즉위 이후 두 사람의 대립은 더욱 격화되어 1248년에는 전쟁 직전까지 치닫았지만 그 해에 귀위크가 사망하여 무산됐다. 그 이후 바투는 [[툴루이]] 의 왕비 [[소르칵타니]] 와 손 잡고 [[우구데이 칸|우구데이]]계 와의 분쟁이 다시 발생했다. 바투는 1251년에 [[쿠릴타이]]를 통하여 [[툴루이]]의 장남 [[몽케 칸|몽케]] 가 [[카간|대칸]]에 오르도록 도왔다.
 
바투의 후손들은 300년동안 러시아를 통치했고 바투의 모계 후손 이반이 러시아제국을 선포하여 이를 간접적으로 계승했다. 바투의 다른 후손들은 우즈베키스탄으로 건너가 우즈베크 칸국을 건국했고 다른 후손들은 중앙아시아에서 명나라와 패권 다툼을 한 티무르제국을 건국했으며, 티무르의 후손들은 훗날 인도에 무굴제국(몽골제국)을 건국했다.
바투와 그의 장남 [[사르타크]]가 죽었을 때 바투의 형제 [[베르케 칸|베르케]](1207 이후 ~ 1266)가 킵차크 칸국을 계승하였다. 베르케는 몽골의 그의 사촌들과 통합하려하지 않았으며 [[훌라구]] 칸과는 전쟁을 하였다. 그러나 베르케는 중국을 그의 이론적인 상부로 공공연히 인식하였다. 사실 베르케는 그때까지 독립적인 군주였다. 다행스럽게도 베르케는 유럽 공략에 관하여 바투와 이해를 공유하지 않았다.
 
바투는 적어도 4명의 자식을 낳았는데 [[:zh:托托罕|토코]] 칸은 차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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