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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함께 일제(日帝)와 동맹한 [[러시아 제국]]이 재러시아 한국인들의 민족운동을 탄압하자, [[이종호]](李鍾浩) 등과 더불어 중국 [[왕청현]](汪淸縣) 라자우거의 한인촌으로 거점을 옮겨 대전무관학교(大甸武官學校)를 설립하고 독립군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듬해 일제의 사주를 받은 중국 관헌의 탄압으로 무관학교는 해체되고, 그 또한 일제 관헌에게 쫓기는 몸이 되어 왕청현 하마탕의 한인촌에 숨어 요양하였다.
 
[[1917년]] 봄 [[러시아 혁명|볼셰비키혁명]]이 일어나자, 다시 블라디보스토크으로 건너간 그는 볼셰비키에 가담하여 활동하다가 7월 초 '독일제국의 밀정'으로 오인되어 [[케렌스키 임시정부]] 헌병대에 체포되어 수감되었다. 그러나 [[1918년]] 초 이 지역을 장악한 볼셰비키 가운데 한국인 출신으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하바로프스크]]시 책임비서, 원동소비에트 집행위원회 외교부장이었던 여성혁명가 [[김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스탄케비치]]의 도움으로 풀려나 하바로프스크로 이주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는 한국민족운동에 사회주의를 접목시키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918년]] [[4월 28일]](러시아러시아의 구력)구력인 [[율리우스력]]) 하바로프스크에서 [[한인사회당]](韓人社會黨)을 조직하고 연해주(沿海州)에서 한인적위군(韓人赤衛軍)을 편성하는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1919년]] [[3·1 운동]] 직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문창범]](文昌範) 등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으며, 대한임시정부(大韓臨時政府) 군무총장(軍務總長)으로 취임하여 동녕현(東寧縣)에 독립군을 지휘할 임시군집부(臨時軍執部)를 설치하고, 일본과 독립전쟁을 전개할 독립군 양성에 강한 추진력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