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포티오스 1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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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니콜라오는 이듬해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진상조사를 위한 위원회를 열자고 하면서 은근히 콘스탄티노폴리스 관할 교구들의 로마 교구로의 이관을 비추었다. 그러나 [[860년]] 여름 [[루스족]]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침공했으나 별다른 피해없이 물러나자 포티우스의 인기가 높아졌고 이그나티우스는 더 고통을 받았고 교황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861년]] 로마 교황은 두 사람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파견하여 진상을 조사하게 했으나 이어 벌어진 공의회에서는 포티우스를 추인하는 결정이 내려졌다. 교황은 아무런 주교구에 대한 로마 교회에 아무런 소득도 없이 그러한 결정이 내려진데 격노했고 [[863년]] 라테라노에서 종교회의를 열어 포티우스에게 사퇴하지 않으면 파문에 처하겠다고 결정했다.
한편 [[대모라바 왕국]]의 군주 [[
불가르족의 개종으로 더욱 기세가 등등해진 포티우스는 교황과 대립각을 세우는 데 더 유리해진 입장이 되었다. 그러나 보리스 1세가 불가리아 총대주교를 임명해 달라고 하는 요청을 포티우스가 거절하는 바람에 불가리아는 로마 교황의 세력으로 옮겨버렸고 교황은 파울루스와 [[교황 포르모소|포르모소]]를 불가르 궁정에 파견하여 충성을 서약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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