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프랑스 관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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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응우옌 왕조 성립부터 코친차이나 할양까지 (1802년~1862년) ===
====응우옌 왕조 명명제=====
[[응우옌 왕조]] 초기 얼마간, 베트남과 프랑스는 교섭이 없었다가 프랑스는 프랑스 혁명(1789년)과 [[나폴레옹 전쟁]] 종전(1815년) 이후, 통상관계를 요구하고 베트남에 사자를 파견하는 등 베트남의 경영문제에 대하여 적극적인 자세로 나왔다.<ref name="신승하"/>{{Rp|335~337}} 그러나 [[자롱]] 황제는 건국의왕조수립의 공적을 인정하여 프랑스 사람을 우대하고 있었지만, 통상요구에 대해서는 일관되게 거부하는 입장을 취하여, 프랑스의 태도를 보고 경계하기 시작하여 쌍방의 관계는 악화되었다.<ref name="신승하"/>{{Rp|335~337}} 게다가 [[명명제]]가 즉위(1820년)하면서 점차 프랑스 사람에 대한 우대조치도 인정받지 못하게 되었다. 1826년에는 개국을 요구하는 프랑스 군함의 함장과의 접견을 거부하고, 1826년에는 역시 건국 때의 공적자인 프랑스인 쇼니의 조카가 영사자격으로 순방을 해왔지만 이것마저 거부해, 베트남과 프랑스의 공식관계는 한동안 중단되었다.
 
====가톨릭 탄압====
더구나 이 시기에 베트남에서 기독교가[[기독교]]가 박해받음으로써 베트남-프랑스 간의 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었다. 명명제가 즉위하면서 기독교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어, 1836년에[[1836년]]에 유럽인 선교사 7명을 처형하고 수백의 협회가[[교회]]가 파괴되자, 탄압을교회탄압을 두려워한 수 만의 민중들이 산이나 들로 숨어들었다. 19세기 중반 베트남의 [[가톨릭]] 교도가 45만 명으로 늘어나자늘어났다. 응우옌 왕조는 대대적인 [[기독교]] 탄압으로탄압을 하였다. [[1840년]]~1860년까지 유럽인 선교사 25명과 [[베트남]] 성직자 300명을 처형하여 2만 명의 신도가 죽었고, 그들의 마을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함대 파병====
1842년 영국이 [[제1차 아편 전쟁]]에서 승전하고, [[난징 조약]] 체결로 중국 내 우위를 점하기 시작하자, 프랑스는 남쪽에서 중국으로 접근함으로써 이러한 영국의 개입에 대응하기를 희망하였다. 이에, 1843년 프랑스의 외무장관 [[프랑수아 기조]]는 [[장바티스트 세실]] 제독과 레오나르 샤르네르([[:fr:Léonard Victor Charner|Léonard Charner]]) 대령의 지휘하에 베트남에 함대를 파병하였다.<ref>Chapuis, Oscar (2000), 《The Last Emperors of Vietnam: From Tu Duc to Bao Dai》 Greenwood Publishing Group p.5 ISBN 0-313-31170-6 "Finally, public pressure, manipulated by the Catholic church, forced Guizot to adopt an ambiguous line of conduct. Under the cover of assistance to the British in China, in 1843 he dispatched a fleet under the command of Admiral Cecile and Captain Charner, together with a diplomatic mission headed by Lagrene, who was to negotiate trading privileges with China." </ref> 이것은 프랑스의 베트남에 대한 개입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중국 내에서의 영국의 활동을 돕고, 베트남 내에서 프랑스인 선교사들에 대한 박해에 대한 보복이라는 핑계를 내세웠다. <ref name="Tucker"/> {{Rp|27}}
====뜨득 황제====
 
프랑수아 기조는 세실을 베트남으로 보내어 가톨릭교회 선교사인 도미니크 르페브르([[:en:Dominique Lefèbvre|Dominique Lefèbvre]]) 주교를 구출해 오도록 했다.(1845년) <ref name="Chapuis"/> {{Rp|5}} 1847년에 즉위한 [[뜨득]] 황제도 선대에 이어 보수주의와 쇄국정책을 펼쳤다. 1847년, 2명의 프랑스인 선교사들(베트남에 은밀히 들어갔다가 2번째로 수감된 도미니크 르페브르 주교와 뒤클로스)이 수감되자 이들을 구출하고, 베트남에서의 기독교 의식의신앙의 자유를 얻어내기 위하여 <ref name="Tucker"/> {{Rp|28}} 세실은 2대의 전함(글르와르, 빅토리외즈)과 라피에르(Augustin de Lapierre) 대령을 다낭에 보냈다. <ref name="Chapuis"/> {{Rp|5}} 만약 라피에르 대령이, 르페브르 주교가 이미 자유의 몸이 되어 싱가포르로[[싱가포르]]로 가는 길이었다는 점을 미리 알았더라면, 라피에르는 베트남의 배들의 마스트를 해체함으로써 공격을 개시하지 않았을 것이다.<ref name="Chapuis"/> {{Rp|5}} 협상이 아무 성과없이 결렬되자 결과적으로 1847년 4월 14일, 프랑스는 다낭 항에 정박중이던 나머지 다섯척의 황동 갑판으로 되어 있는 배들을 침몰시키는 공격을 이어갔다. <ref name="Chapuis"/> {{Rp|5}} 1847년 4월 15일, 프랑스 함대와 베트남 배들간의 전투(다낭 폭격)가 벌어져, 베트남 배들중 세 척이 침몰하고 프랑스 함대는 도망쳐 나왔다. <ref name="Tucker"/> {{Rp|28}}
====나폴레옹3세====
 
한편, 프랑스에서는 [[나폴레옹 3세]]가 쿠데타(1851년)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프랑스가 동아시아에 세력을 확장하지 않는다면 2류 국가로 전락할지도 모른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프랑스가 문명화된 서구 문화를 전파해야 할 임무를 띠고 있다는 사상이 퍼져 있었다. 결국 프랑스의 베트남 진출은 베트남을 식민지로 삼으려는 목적이었다.<ref name="신승하"/>{{Rp|335~337}}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는 [[영국]]과 연합하여 [[제2차 아편 전쟁]]([[1856년]]~[[1860년]])을 치르는 한편 <ref name="신승하"/>{{Rp|335~337}} 인도차이나에 프랑스 식민지를 구축하기 위한 단계들을 밟아 나갔다. [[스페인]] 출신의 [[호세 마리아 디아스]]([[:it:José María Díaz Sanjurjo|San Jose María Díaz Sanjurjo]]) 신부가 베트남에서 순교하자 ([[1857년]] [[7월 20일]], →[[:en:Thomasian Martyrs|Thomasian Martyrs]])<ref>{{웹 인용|url=http://www.saintwiki.com/index.php?title=OP_Calendar/Martyrs_of_Vietnam |title=OP Calendar/Martyrs of Vietnam}}</ref>, 그는 프랑스의 [[로마 가톨릭]] 선교사들에 대한 베트남의 박해에 응징하고 베트남 조정에 프랑스군의 베트남 주둔을 강요하고자 전쟁의 개시를 승인([[1858년]])하였다. 이로써 1858년부터 베트남과 프랑스는 전쟁에 돌입하였다. [[프랑스 해군]]은 리고 드 주누이([[:fr:Charles Rigault de Genouilly|Rigault de Genouilly]]) 제독 지휘하에 [[다낭]]과 [[사이공]]을 점령(각각 [[1858년]] [[9월 1일]]과 [[1859년]] [[2월 17일]])하였다. 사이공의 점령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식민지화]]의 시작이었다. <ref>조르주 뒤비 지음, 채인택 옮김, 《지도로 보는 세계사》, 생각의 나무 (2006) 236쪽</ref>그리고, [[프랑스 해군]]은 남부 [[베트남]]의 요충지에서 베트남군을 패퇴시켰다. 프랑스는 [[1861년]]에는 대대적인 침략을 감행하였다. 결국 [[뜨득]] 황제는 [[1862년]] 항복하고 만다. 프랑스와 베트남 간에는 불평등 내용을 담은 [[사이공 조약]]을 체결하고<ref name="신승하"/>{{Rp|335~337}} 전쟁은 종결되었다.(→[[베트남-프랑스 전쟁]]) 사이공 조약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남부 [[베트남]]의 [[비엔호아]],[[쟈딘]]<ref>쟈딘(Gia Định)은 현재의 [[호찌민 시]]를 말한다. </ref>, [[딘뜨엉]](Định Tường) 3개주<ref>나중에 프랑스는 이를 [[코친차이나]]라 명명하였다.</ref>를 할양한다.(2) 베트남은 프랑스에게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지불한다. (3) 프랑스의 전함이 [[메콩 강]]을 자유항해하는 것을 허용한다.<ref>이로써 1867년 프랑스는 캄보디아를 점령하고 보호국화하였다.</ref>(4) 프랑스의 베트남 내에서의 자유로운 [[로마 가톨릭교회|가톨릭]] 포교 특권을 인정한다. (5) 3개의 항구를 프랑스와의 무역을 위해 개항한다. (6) 베트남이 다른 나라와 교섭할 때 프랑스 황제의 동의를 받도록 한다. (↔[[응우옌 왕조]])
 
=== 홍 강 통상 문제와 북부 베트남 공략(1867년~1883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