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두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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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돌 이전 ==
1950년 [[3월 7일]] 티베트 정부 대표단이 새로 성립한 중화인민공화국과의 대화를 가졌다. 중화인민공화국은 티베트의 특히 "영역 보전"을 존중하고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인도]]의 [[칼림퐁]]을 방문했다. 그렇지만 티베트, [[인도]], [[영국]], 중화인민공화국 사이에서중화인민공화국이 회담 개최 장소에 대한 의견 차이를 보였기 때문에 성사되지 않았다.
 
1950년 [[9월 16일]] 티베트 대표단이 인도 주재 중화인민공화국 대사를 역임하고 있던 위안중셴(袁仲賢)을 만났다. 위안중셴은 '티베트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일부분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은 티베트의 국방, 무역, 외교를 담당한다.'는 조건을 제시했는데 이를 받아들이면 "평화적인 해방", 받아들이지 않으면 전쟁을 벌이겠다는 의견을 전달했다. 1950년 9월 19일 [[체폰 샤캅파]] 티베트 재무부 장관이 협력을 추진하기 위해 몇 가지 조건을 달았는데 이 가운데에는 중국군이 티베트에 주둔하는 조항이 담겨 있었다. 당시 티베트는 주변 국가에 대한 군사적 위협이 없었지만 인도, 네팔이 티베트를 공격하면 중국에 군사적인 지원을 받아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