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두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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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9월 19일 [[체폰 샤캅파]] 티베트 재무부 장관이 협력을 추진하기 위해 몇 가지 조건을 달았는데 이 가운데에는 중국군이 티베트에 주둔하는 조항이 담겨 있었다. 당시 티베트는 주변 국가에 대한 군사적 위협이 없었지만 인도, 네팔이 티베트를 공격하면 중국에 군사적인 지원을 받아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다.
 
[[라싸 시]]에서 논의가 진행되는 동안 1950년 [[10월 7일]] [[중국 인민해방군]]은 티베트 동부를 침공하면서 "사실상의 국경" 5개를 침범했다. 이 목적은 티베트 침공 자체가 아니라 [[티베트군]]을 창두에서 포위하여 섬멸시켜서 라싸 정부의 영향력을 감퇴시키는 한편 베이징에 협상 대표를 파견해서 평화적으로 티베트를 편입시키는 조약에 서명하는 것이었다.
 
1950년 [[10월 21일]] 라싸 정부는 [[중국 공산당]] 정부와의 협의를 위해 베이징에 주재하고 있던 티베트 대표단을 철수하도록 지시했다. 또한 [[달라이 라마]]의 신분이 보장된다면 일부 요구 사항을 제외한 최초의 요구 사항에는 합의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 전투의 전개 ==
중국 인민해방군의 침공 이전에 [[캄]]과 티베트 정부와의 관계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 때문에 캄은 티베트 정부를 반대했고 창두에서 일어난 중국 공산당의 행동에 가세했다. 인민해방군은 캄에서 어떠한 저항 없이 캄을 점령하게 된다. 판다창 랍가(Pandatsang Rapga)는 응가포이 응가왕 지그메(Ngapoi Ngawang Jigme)에게 티베트 정부가 캄의 독립을 인정하는 대신에 몇몇 캄 출신 전사들을 저항에 참가시키자고 제안했지만 지그메는 이를 거부했다.
 
창두 전투 중에 랍가(Rapga)와 톱가이(Topgay)는 중화인민공화국과의 협상에 참여했다. 캄 주민들은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민해방군의 진행은 순조롭게 성공했다. 협상이 실패한 지 1개월 뒤에 티베트는 안전 보장을 위해 외국의 원조와 군사적 지원을 받으려고 시도했으며 인민해방군과 티베트군 양측의 병력이 증강했다. 인민해방군은 1950년 [[10월 6일]] 또는 [[10월 7일]]에 [[진사 강]]을 넘었다.
 
압도적인 수를 갖고 있던 인민해방군의 2개 부대는 1950년 [[10월 19일]]에 티베트군을 국경에서 가까운 창두 주변에서 재빨리 포위했다. 이 과정에서 인민해방군 병사 114명, 티베트군 병사 180명이 사상했다. 활발한 전투는 가모응굴추 강(Gyamo Ngul Chu) 북동부, 티베트 정부가 관리하는 동경 96도 동쪽의 국경에 한정되어 있었다. 창두를 점령한 인민해방군은 교전을 정지했고 포로로 잡힌 응가포이 응가왕 지그메를 라싸로 보내서 협상 조건을 다시 제시했다. 또한 티베트 정부가 베이징에 대표를 보내는 것을 기다렸다.
 
== 전투 이후 ==